"신 중국 리더 후친타오" / 양중메이 / 한국경제신문
1911년 10월 10일(쌍십절)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 건설, 청나라가 멸망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정부 수립. 1930년 일본군에 의하여 만주사변이 발생하고 1937년 중일전쟁으로 중국인 30만 명을 죽이는 남경대학살 발발.
1942년 12월 후진타오 탄생, 『동방의 뉴욕』 중국의 최대 상업도시 상해에서 유년시절. 아내 류용칭 1947년 대포초등학교, 1953년 태주시 제2중학교, 1957년 신안강 수력발전소 배치(65만 kW), 1959년 청화대학 졸업.
1945년 6월 13일 제7기 1중전회의에서 모택동은 중국 공산당 최고 권력을 움켜쥐게 되었다. 그 후 41년간 절대독재 권력으로 통치했다. 1949년 10월 모택동이 이끌던 중국 공산당은 오랜 혁명전쟁으로 승리,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1965년 4월 후진타오는 1년간의 예비 당원 검증을 거쳐 정식으로 공산당원이 되었다. 1966년 5월에서 1976년 10월까지 문화대혁명은 중국을 휩쓸었다.1976년 9월 9일 모택동 사망하여 정치계는 3파로 나누어졌다.
첫째 등소평을 주축으로 하는 원로 간부 실력파, 둘째 화궈평 후계자를 주축으로 하는 중도좌파 기득권집단, 셋째 지앙칭, 장춘차오, 왕홍원, 야오원유엔이 이끄는 문화혁명 극좌세력 4인방이다.
1978년 말 제11기 3중전전회에서 등소평이 화궈평을 물리치고 주도권을 장악하여 최고 권력자로서 자리를 잡았다. 1979년 이 해에 중국에서는 한 부부 한아이만 낳도록 했다.
1981년 제11기 6중전회의에서 등소평이 모택동으로부터 독재 권력을 물려받았다. 1982년 후진타오는 청년간부 양성반에 입학하게 되었다. 1983년 10월 또 한번 문화혁명 방식의 청오운동(정신오염 정화운동)이 등소평이 좌파세력을 부추겨서 일으킨 운동이다.
1984년 11월 공청단 제11기 3중전회의에서 중앙 제1서기에 후친타오가 당선되었다.
1989년 호요방이 사망하고 그해 가을에는 200만 명이 모일 수 있는 천안문에서 천안문사태 발생. 1990년 7월 하순 당 총서기에 임명된 강택민은 티베트를 방문 후진타오의 보고를 받고 그의 정치 수완에 감명함.
1994년 10월 제14기 중전회에서 등소평은 권력을 강택민에게 물려주었다. 1997년 2월 19일 등소평 사망. 후 9월에 제15차 당 대회가 소집되어 강택민을 최고 권력자로 인정했다. 중국 공산당 대회는 5년에 한 번씩 열린다.
2002년 9월 제16차 당 회에는 후친타오가 강택민의 퇴임으로 최고 권력에 올랐다. 2007년 9월에는 제17차 당 대회가 열릴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에는 “사람들은 스스로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신들이 진정 원하고 또 스스로 선택한 조건에서 역사를 만들지 못한다. 그냥 직접 부딪치거나, 이미 정해져 있거나, 과거로부터 형성된 조건 속에서 역사를 만든다. 이미 죽은 모든 세대들의 전통이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 악몽처럼 짓누른다.”
혁명과 전문기술의 관계는 정치와 실무의 관계이다. 겉만 번드레한 정치는 여태껏 없었다. 정치란 모두 실무적인 경험이 있어야 구현되는 것이다.
후진타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범을 그리려다가 개를 그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책의 수립 및 추진에 있어 신중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택동은 “지도자는 능히 사람을 감동시키는 문장을 써야 한다.” 후야오방은 “관리자는 오늘 일을 오늘에 끝내고야 마는 책임감 있는 관리태도 및 실사구시의 실무정신이 있어야 한다.”
후진타오는 학생 또는 인민들의 충돌사건은 그 발단부터 단호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대규모 경찰을 이동 배치시켜 명령을 기다리게 했다. 그런 다음 현장으로 달려가 설득에 나섰다.
“확고한 신념과 강력한 추진력을 갖추어야 한다. 성실하게 일하고 헛된 명성을 꾀하지 않아야 한다. 권위주의적이거나 인민을 깔봐서는 안 된다. 항상 군중과 함께 해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과감한 결단력을 보여줘야 한다. 또 자신의 생활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니다.”
후진타오는 이 원고를 직접 썼다. 중요한 결의나 보고는 대부분 그룹으로 하여금 쓰게 했지만 발표 전에 반드시 상세하게 검토, 자신의 의견과 견해를 추가 시켰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는 시비가 엇갈리고 흑백이 뒤바뀌며 미와 추악함이 구별되지 않게 됐다. 선악의 판단이 서지 않는 사상이나 관점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는 말이 많으면 반드시 잃는 게 많다는 정치 속성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스스로 말을 삼가며 조심했다. 자신이 주관하는 업무 이외의 분야에 대해서는 가급적 말을 아꼈다. 또 남을 놀라게 하는 말도 되도록 하지 않았다.
강택민 등 지도자의 면전에서는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지 않았다. 회의에서는 인내를 갖고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되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후진타오와 주룽지는 모두 뇌물을 받지 않고, 개막식 등의 테이프를 자르지 않으며, 서체를 남기지 않는다. 라는 원칙을 지켜나갔다.
프리드리히 헤겔은 “역사는 재연이다. 단지 새로운 기초 위에서 재연될 뿐이다.” 끝. '09.11.15 '11.6.9 2012.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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