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책(冊)

시간을 지배하는 인간

물조아 2007. 6. 1. 06:23

시간을 지배하는 인간 / 이미 돌아가신 지 40여 년이 됐지만 통도사에 구하(九夏)라는 법명의 고승(高僧)이 있었다. 한말에 이등박문에 붙어 요염을 부렸던 배정자와 더불어 통도사에서 동승(童僧) 생활을 했던 분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구하 스님은 노쇠하여 눈도 안보이고 귀도 들리지 않아 오로지 촉각과 영감만이 살아 있을 때의 일이었다. 스님은 빗물을 손바닥에 받아보는 것만으로 이 비 끝에 어느 법당 앞의 모란이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라고 하고,


아침에 안개를 얼굴에 쐬어보고 종각 곁의 단풍이 오늘부터 붉어지기 시작할 것이라는 등 시후(時候)를 단 하루도 어김없이 예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거처하는 승방에 시계 걸어두기를 평생 동안 거부한 분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마루에 쬐어 내리는 햇살을 손바닥에 받아보고 시간을 분 단위 까지 알아 맞추는데, 가장 큰 오차가 10분을 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볕의 따갑고 차갑고로 분간하는 것이 아니라, 볕의 무겁고 가볍고로 분간했다 하니 속인은 그 경지를 이해는커녕 상상하기도 힘들다.


구하스님만은 못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이처럼 시후와 생리와의 함수관계로 시간을 지적하고 살았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배시계라는 말도 있듯이 생리시계, 곧 바이오리듬에 의해 점심때가 됐구나하여 시간을 알고, 논을 갈기 시작하여 한마지기를 갈고 나면 새참 때가 됐구나 하고 시간을 알았다.


곧 사람이 시간을 지배했던 것이다. 한데 시계라는 고달픈 미물이 생겨나면서부터 그에 의존하는 바람에 자연의 오묘한 생리시계가 퇴화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까지 출근하느니, 정오에 만나느니 하는 특정의 시간에 구속되고 지배받고 시간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 바꿔 말하면 자유로워야 할 인간이 시계를 가짐으로써 자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시계를 갖는다는 것은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다. 시계를 갖고 가지지 않고와 관계없이 흘러가는 것이 시간이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그 시간을 굳이 잡아다가 각박하게 자르고 쪼개어 자신의 자유와 행동을 그 촌각 속에 구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시시각각 죄어드는 구속의 올가미를 자신의 목에 거는 격이다.  끝. '09.11.17  2012.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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