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책(冊)

담론 / 신영복 / 돌베개

물조아 2018. 8. 23. 18:15


 

- 신영복 저자에 대하여~

 

1941~2016년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졸업.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년 복역. 1988년 출소. 1989년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처음처럼

 

- 무엇인가를 느껴 마음속에 새겨놓고 싶어서 붉은색 볼펜으로 밑줄을 긋고 노트북에 메모를~

 

공부(工夫)는 공()은 하늘()과 땅()의 연결이라는 뜻입니다. ()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공부란 천지를 사람이 연결하는 것입니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나 또한 세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계 인식과 자기 성찰이 공부입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먼 여행이 남아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가슴에서에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배울 것이 없는 상대란 없습니다. 문제는 배울 것이 없다는 폐쇄된 사고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열린 사고입니다.

 

주어진 조건 속에서 크게 억압을 느끼지 않고 나름대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조건을 바꾸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주어진 조건이 그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과 체제가 억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세상의 혼란을 바로잡으려면 먼저 그 원인을 알아야 한다. 그 원인을 밝힌 다음에라야 능히 그것을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 질병의 원인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부 이상은 예로 처벌하고 서민들은 형으로 처벌하는 것이 우리의 사법 현실입니다. 정치 경제 사범은 불법행위자입니다. 반면에 절도, 강도와 같은 일반 사범은 범죄인이 됩니다.

 

엄청난 차이입니다. 한쪽은 그 사람의 행위만이 불법임에 반하여 다른 쪽은 인간 자체가 범죄인이 됩니다. 사법 현실과 사회의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능력이 100% 이면 70% 의 역량을 요구하는 곳에 가는 게 득위입니다. 반대로 70% 의 능력자가 100% 의 역량을 요구하는 자리에 가면 실위가 됩니다. 그 경우 부족한 30을 함량 미달로 채우거나 권위로 채우거나 거짓으로 채울 수밖에 없습니다.

 

“70%가 득위다.”라는 주장에 반론도 없지 않습니다. 능력이 70% 밖에 안 되더라도 100%의 자리에 가면 그만한 능력이 생기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자기에게는 그것이 기회가 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을 몹시 고통스럽게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모스크바의 지하철에서는 전혀 다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노인이 탑승하자 청년들이 얼른 일어서서 자기 자리로 모셔 앉히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 세 번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 현지 교민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대답은 당연한 일이지요!” 였습니다.

 

이 전철을 저 노인들이 건설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혁명적 열정으로 청춘을 바쳐 건설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대학의 학생들은 다른 대답이었습니다. 노인들이 건설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월급을 받기 위해서 일한 것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것 역시 당연한 대답이었습니다. 문제는 같은 사안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읽히는 이유입니다.

 

쑥과 잡초의 차이는 이름에 있습니다. 쑥은 이름이 있는 풀이고 잡초는 이름이 없는 풀입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쑥이 인식 대상인 까닭은 쑥이 우리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잡초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인식 대상이 안 된 것입니다.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 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를 줄이면 자유(自由)가 되기 때문입니다.

 

떨리는 지남철의 전문을 함께 읽는 것으로 강의를 끝마치겠습니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서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 썅 태풍 솔릭 시마론도 이 또한 지나가라면서 태풍 후 맑은 날을 기대하면서~ 첫째 둘째 셋째로 구분하니~

 

주어진 조건 속에서 크게 억압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조건을 바꾸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과 체제가 억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둘째 배울 것이 없는 상대란 없습니다. 문제는 배울 것이 없다는 폐쇄된 사고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열린 사고입니다. 셋째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이 어느 한 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