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책(冊)

노자 / 박은희 역해 / 고려원

물조아 2017. 2. 14. 22:11

   

- 노자 저자에 대하여~

 

노자(老子) 자연의 도와 덕의 의미를 논한 노자의 도덕경은 풍부한 은유가 함축된 철학 시와 같다.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다 변한다는 사실뿐이다라고 말 한 것처럼 노자가 말한 도는 만물의 변화법칙이며, 덕은 바로 도의 실천이다. 하지 않아도 자연처럼 저절로 이루는 것이다.

 

- 무엇인가를 느껴 마음속에 새겨놓고 싶어서 붉은색 볼펜으로 밑줄을 긋고 노트북에 메모를~

 

노자가 말하는 무위란 인위와 조작을 버리고 지식과 욕망을 없애며 스스로 있는 그대로에 따라 행동하는 것, 무엇을 억지로 하거나 강제로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본모습을 자각하고 언제나 이를 그대도 지키면서 과장하거나 과시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다운 삶의 모습니다.

 

천지자연의 이치()는 사람처럼 의지와 감정을 지닌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목적이나 의도도, 가치나 의식도 없다. 그저 스스로 그러할 뿐이다. 봄이 되면 만물은 생기가 돋아나고 겨울이 되면 생기가 사라진다. 자연스러운 변화일 뿐이다.

 

무위자연의 진리를 깨닫고자 한다면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만들며 명상을 통해 관조해야 한다. 아무런 함(욕망과 충동의 활동)이 없고 스스로 그러한 경지에 이른다. 세속적인 교활한 지식이나 감각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무심의 경지에 노닐면서 순진무구하다. 그는 또한 부드럽고 유연하다.

 

도라는 것은 우주의 근본법칙이자, 이 세계의 궁극적 원천이며 또한 근원적 진리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욕망과 충동을 없애는 일이며, 문명과 제도의 억압과 구속에서 해방되는 과정이다.

 

참다운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다.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우리는 참다운 진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즉 우리의 욕망과 충동에 가려지고, 문명과 제도에 의해 억압되고 왜곡되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도는 길이라는 뜻이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우리가 살면서 걸어가야 할 길로서의 진리이고 동시에 우주와 만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도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천지만물 자연계의 근원이다.

 

무위의 도를 실천하는 데에는 첫째 자애, 둘째 검약, 셋째 감히 천하에 앞서지 않는 것 이라는 세 가지 보배가 있다. 첫째 자애는 남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둘째 검약은 사치와 낭비를 배격하고 자신이 지닌 것을 아끼며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것이다 셋째 세상 사람의 앞에 서지 않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본받아 자기 내면의 생명을 확장하면서 비어있고 고요함’, ‘다투지 않음을 이상적인 삶으로 여긴다. 그러하여 모든 세속적 선악과 시비를 벗어나고, 아울려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일체의 것에서 초월한다.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가? 그것은 명예와 이익이다. 만약 위정자가 욕망의 대상이 되는 명예와 이익을 가치의 기준으로 내보이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각기 스스로 정신이 안정되고 마음이 혼란하지 않을 것이다. 가치관이 올바로 확립된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은 평온하다.

 

다툼과 도둑질, 그리고 마음의 혼란을 없애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들의 탐욕스런 생각을 정화시켜 분쟁과 혼란의 소지를 없애며, 다른 한편으론 사람들에게 삶의 안정과 만족을 적절하게 제공해 주는 것이다.

 

온전함을 구하는 길은 다투지 않음보다 좋은 것이 없다. 다투지 않는 길은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옳다고 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고, 스스로를 자만하지 않는 데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깊이 맺어진 크고도 깊은 원한은 아무리 화해를 시켜 두어도, 원한을 풀고 난 그 뒤에 응어리가 반드시 남게 된다. 그것은 결콘 일을 잘 처리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애당초 원한을 맺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맺은 뒤에 푸는 것은 잘한 일이 못되기 때문이다.

 

참다운 지도자는 자신을 내세우거나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아랫사람들로부터 자발적인 추대와 존경을 받는다. 그리고 아랫사람들은 그를 사랑하며 존중하는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장수는 함부로 무력을 과시하지 않는다. 또한 참으로 잘 싸우는 사람은 성을 내거나 흥분하는 일이 없다. 그는 적을 업신여기거나 흥분해서 마구 덤비지 않는다. 적을 잘 이기는 사람은 정면으로 맞붙지 않는다.

 

전쟁이란 나와 상대가 서로 무력을 겨루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고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 우선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신도 알지 못하고 적을 함부로 업신여긴다면 그보다 커다란 재앙은 없을 것이다.

 

만약 뛰어난 업적이나 명예를 성취한 뒤에 몸이 물러난다면’, 그 사람에게는 결코 가득 차는 일이 없을 것이니 그것이 바로 자신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는 길이다. 그릇에 물이 가득 차면 결국 넘치게 될 뿐이다.

 

자신의 세력이 강성할 때 우리는 마치 영원히 그 세력이 지속될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그럴 때일수록 고요히 물러나며 겸허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세력이 강함을 과시하면서 남을 업신여긴다면 반드시 위태롭게 된다.

 

사납게 부는 회오리바람은 아무리 오래갈 듯이 보여도, 아침이 채 가기 전에 그치고 만다. 세차게 내리는 소나기를 보라. 세차게 내릴수록 소나기는 얼마 못 가는 법이다. 이는 대자연조차 자연 본래의 스스로 그러한 법칙을 어길 수 없어서이다.

 

무겁고 중후한 것은 가볍고 경솔한 것의 근본이 된다. 고요하고 안정된 것은 조급하고 시끄러운 것을 다스리는 주인이라 할 수 있다. 만약 통치자의 경박하고 경솔한 행동은 정치적 혼란과 사회의 무질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약한 것이 엑센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사실을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실행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진리이지만, 막상 이를 실행단계로 옮기는 사람은 참으로 보기 드문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물이다. 지극히 부드럽고 일정한 형태가 없는 삶, 다시 말해 함(욕망과 충동의 활동)이 없는 무위의 자세, 그러한 삶의 방식이 참으로 유익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 만물 중에서 가장 도와 닮은 것은 바로 물이다. 물은 부드럽고 약하며,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남과 다투지 않고, 자신을 낮춘다. 물을 닮은 사람! 그는 위대한 인격의 소유자일 것이다.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르면서도 웅덩이가 있으면 이를 다 채운 뒤에야 흘러서, 움직일 수 있으면 움직이고 가만히 있어야 할 때에는 가만히 있다.

 

물은 한없이 부드럽고 약하며 결코 자기를 내세우거나 상대에게 어떤 강요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물은 모든 어려움을 견디고, 아무리 단단하고 억센 것이라도 결국은 이기지 않는가?

 

허물은 남과 다투기 때문에 생겨난다. 다투지 않는다면 아무런 허물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물은 최상의 선을 지니고 있다.

 

생명의 본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만물이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속에서의 영원한 법칙이기에 이를 영원함()이라 부른다. 이런 영원함을 아는 것, 다시 말해 만물은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근원으로 복귀하여 생명의 본래 상태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다.

 

준엄한 법률과 엄격한 형벌로 백성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법치주의, 이는 바로 통치자에게 성실과 신의가 부족하다는 징조이다. 통치자에게 성실과 신의가 부족하면, 백성은 당연히 그를 불신하게 된다. 때문에 강제와 억압을 사용하는 법치주의란 결국은 비참한 말로에 빠지게 된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지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작은 생선을 지질 때는 창자를 빼는 일도 없고 비늘을 치는 일도 없다. 또한 엎었다 젖혔다 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너무 번잡하게 하면 오히려 불안과 혼란을 초래할 뿐이다. 번잡한 인위를 가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인생의 길고 긴 과정은 반드시 굳센 실천력과 인내심으로 하나하나 완성해 가야 한다. 최후의 순간까지 조금이라도 해이하거나 나태해서도 안 되며 또한 결코 무리하거나 억지를 부려서도 안 된다.

 

세상 사람이 일을 할 경우 언제나 다 되어 가고 있을 때 실수를 하게 된다. 따라서 마지막 손질을 할 때에도 처음 시작할 때처럼 조심하며 신중히 처리한다면 실패하는 일이란 없을 것이다.

 

근심을 없애기 위해서는 환난이 발생하기 전에 먼저 예방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일은 작은 것이 모여서 큰 것이 되며 가까운 곳에서 시작해 먼 곳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를 깨달아 시종일관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면 실패는 없을 것이다.

 

정기를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고, 마음과 몸을 부드럽게 가져 그 싱싱함이 어린아이와 같도록 할 수 있는가? 몸 안의 정기를 완전히 보전하여, 어른들이 음탕한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그 무엇에 비할 수 없는 유연한 정신과 육체를 지니라는 뜻이다.

 

현람(玄覽)이란 마음이라는 신비로운 거울을 말한다. 이 마음이라는 거울은 자신의 광명에 의해 사물을 비추고 관찰할 수 있다. 마음의 거울에 때 묻은 것은 씻고, 세상의 티끌이 이것을 어둡게 하는 일이 없을 수 있는가?

 

입을 비롯한 육체에 있는 여러 구멍들을 막아 버려라. 그런 감각기관들이란 인위와 욕망이 생겨나는 곳이다. 더욱이 입을 쓸데없는 말이나 지껄이는 것이 아닌가? 아울러 육체에 있는 정욕의 문을 닫아 버려라. 정욕의 문이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대상이 들어오는 곳이다.

 

구멍과 문을 막는다면 한평생 결코 번거롭거나 피곤한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욕망의 구멍을 막고 정욕의 문을 닫아 버린 사람이다. 그는 결코 쓸데없는 수고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러나 감각과 욕망에 눈이 어두운 어리석은 자들은 그 자극과 충동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하면서 재앙과 불행의 원인을 스스로 만든다. 그러면서도 이를 알지 못하고, 재앙을 당하고서도 그 이유를 모른다.

 

학문을 함(爲學)’은 외재적인 경험의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며, 경험적 지식은 누적을 통해서 증가한다. 도를 함(爲道)’은 직관적 깨달음을 통하여 사물의 미분화된 상태 혹은 자신의 비어 있고 고요한 심경을 안으로 모색하는 것이다. 수양할수록 욕망과 충동의 활동이 더욱 감소된다.

 

- 어느새 한껏 핀 매화에 꿀벌들의 날갯짓으로 봄 향기를 맡으면서~ 책 읽기를 마치고~

 

올인! 100% 결심은 멈출 수 없다.

 

첫째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완전히 몰입하여 전력투구(giving one hundred percent)해야 한다.

둘째 죽느냐 사느냐 벼랑 끝에 나를 세워라. 승리가 아니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셋째 사생결단 죽기 살기로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을 바쳐서 결심한 것을 마지막 끝까지 마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