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책(冊)

미움 받을 용기 /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저 / 전경아 옮김

물조아 2015. 11. 28. 14:20

미움 받을 용기 /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저 / 전경아 옮김 /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

 

- 기미시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 저자에 대하여~

 

기시미 이치로 철학자, 1956년 교토에서 태어나서 현재까지 교토에 살고 있다. 교토대학교 대학원 문학연구과 박사과정 만기퇴학을 했다. 1989년부터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했다. 정신과의원 등에서 수많은 청년을 상대로 카운슬링을 했다. 저서로는 《아들러 심리학 입문》 등이 있다.

 

고가 후미타케 프리랜서 작가, 1973년생, 잡지사에서 활동 후 현재는 서적 라이팅(이야기를 듣고 집필하는 형식)을 전문으로 하여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탄생시켰다. 20대말에 아들러 심리학을 접하고 충격을 받아 아들러 심리학을 배웠다. 인터뷰집 《열여섯 살의 교과서》은 70만부 넘게 팔렸다.

 

- 무엇인가를 느껴 마음속에 새겨놓고 싶어서 붉은색 볼펜으로 밑줄을 긋고 노트북에 메모를~

 

청년: 제 친구 중에 성격이 밝고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Y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해바라기 같은 남자입니다. 반면에 저는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하고 비뚤어진 데가 많은 인간입니다. 제가 Y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철학자: 자네는 지금 행복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네. 왜냐하면 자네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고 있지.

 

Y처럼 되고 싶어서 지금의 자신을 버리려고 하네. 아닌가?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환이 아니라 고쳐가는 것이야. p52

 

물론 태어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 내가 택하진 않았으니까. 게다가 그것들은 꽤 큰 영향력을 갖고 있지. “저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싶었는데”하며 부러워하는 마음도 있을 거야. 하지만 거기서 끝내서는 안 되네.

 

문제는 과거가 아닌 지금 ‘여기’에 있네. 자네는 지금 여기에서 생활양식을 알게 됐어.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는 자네 책임이야. 여태까지의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것도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하는 것도 모두 자네 판단에 달렸지.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일세.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 거지. 행복해지려면 ‘미움 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p63

 

철학자: 내 키는 155센티미터일세. 예전에 나는 키가 작은 것에 이민저만 고민이 아니었네. 이런 생각을 친구한테 털어놓았더니 “쓸데없는 소리!”라고 일축하면서 “키는 커서 뭐 하려고? 너는 사람을 편하게 하는 재능이 있잖아.라고 말했다네. 이후로는 키에 관해서 더는 고민하지 않았네. p87

 

 

청년: 커피숍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웨이터가 제 상의에 커피를 쏟았어요. 평소 저는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를 내지 않는 성격인데, 커피숍이 울릴 정도로 큰소리로 화를 냈어요. 분노로 이성을 잃고 만 거죠.

 

철학자: 일부러 큰소리를 내지 않고도 말로 설명하면 웨이터는 정중하게 사과했을 테고, 깨끗한 수건으로 닦아주는 등 조치를 취했을 것이네. 아니면 세탁소에 옷을 맡겼을지도 모르지. 게다가 자네는 그렇게 하리란 것을 마음속으로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었어.

 

하지만 자네는 큰소리로 화를 냈지. 말로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이 귀찮아서 저항하지도 않는 상대를 더 값싼 수단으로 굴복시키려고 한 것일세. 그 도구로 분노라는 감정을 동원한 것이었다네.

 

청년: 면전에서 인신공격을 받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저 참기만 합니까?

 

철학자: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분노라는 도구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걸세.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참을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분노 이외의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걸세.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욱해서”라는 말이 나오는 거고 분노를 매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거지.

 

상대가 싸움을 걸어오면, 서둘러 싸움에서 물러나게.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지 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네. 분노를 제어하는 것이 ‘참는다’는 것을 뜻하나? 그러지 말고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배우게.

 

분노란 어차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도구니까. 분노란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고 아울러 화내지 않는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하다는 사실이네.

 

우리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나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네. 경험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되면 자연히 분노의 감정도 나오지 않을 걸세. 우리는 언어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지. 말의 힘을 논리적인 말을 믿는 걸세. p121

 

그런데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여겨도 그것을 이유로 상대를 비난하지는 말게. 이것이 많은 사람이 빠지는 인간관계의 함정이지. ‘나는 옳다’고 하는 순간, 권력투쟁에 발을 들이게 되네.

 

또한 지고 싶지 않다는 일념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결과적으로 잘못된 길을 선택하게 되지. 잘못을 인정하는 것! 사과하는 것! 권력투쟁에서 물러나는 것! 이것 들이 전부 패배는 아니야.

 

그러면 자네가 말싸움에서 이겼다고 하세. 패배를 상대가 인정하였다네, 하지만 권력투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 싸움에서 진 상대는 바로 다음 ‘복수’단계에 돌입할걸세. ‘복수’를 계획하고 보복에 나선다네. 인간관계가 복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면 해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네.

 

철학자: 어느 날, 엄마와 딸이 큰소리로 말다툼을 벌였네. 그런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지, “여보세요?” 엄마는 당황해서 수화기를 들었는데 목소리는 여전히 분노의 감정이 남아 있었지.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딸의 담임선생이었네.

 

그걸 안 순간 엄마의 목소리는 정중한 톤으로 바뀌었지, 그리고 그대로 격식을 차린 채 5분가량 담소를 나누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네.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딸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

 

요컨대 분노란 언제든 넣었다 빼서 쓸 수 있는 ‘도구’라네. 전화가 오면 순식간에 집어넣었다가 전화를 끊으면 다시 꺼낼 수 있는. 엄마는 화를 참지 못해서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야. 그저 큰소리로 딸을 위압하기 위해, 그렇게 해서 자기의 주장을 밀어붙이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한 걸세.

 

 

아이가 공부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 원래 이것은 ‘아이의 과제’이지 부모의 과제가 아닐세. 공부가 누구의 과제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네.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그렇다고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켜보는 것. 만약 본인이 공부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를 전하는 걸세.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네.

 

아이는 독립적인 개인일세. 부모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학교나 직장 그리고 결혼상대 일상의 사소한 언행마저도 부모의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네.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 않나. “타인은 자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령 내 자식이라도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일세. p166

 

철학자: 믿는다는 행위 또한 과제의 분리일세. 상대방을 믿는 것, 이것은 자네의 과제일세. 하지만 자네의 기대와 신뢰를 받은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과제인 걸세. 비록 상대방이 내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 믿을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을까.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과 타인의 과제를 떠안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무겁게 짓누른다네. 고민과 괴로움이 있다면 경계선을 정하게. 그리고 타인의 과제는 버리게. 그것이 인생의 짐을 덜고 인생을 단순하게 만드는 첫걸음일세.

 

인간은 모두 인간관계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네. 과제를 분리하게. 어디까지가 내 과제이고, 어디서부터가 타인의 과제인가. 냉정하게 선을 긋는 걸세. 그리고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이 대인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 할 수 있다. p171

 

 

유대교 교리 중에서 이런 말이 있네.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은 반드시 당신을 비판한다. 당신을 싫어하고, 당신 역시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열 명 중 두 사람은 당신과 서로 모든 것을 받아주는 더 없는 벗이 된다. 남은 일곱 명은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이다.”

 

이때 나를 싫어하는 한 명에게 주목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사랑해주는 두 사람에게 집중할 것인가? 혹은 남은 일곱 사람에게 주목할 것인가? 그게 관건이야.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한 명만 보고 ‘세계’를 판단하지. p280

 

 

남이 나에게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즉 행복해지려면 미움 받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나도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기대 같은 것은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내가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준단 말인가?”

 

엄청난 천재지변을 당했을 때 원인론에 입각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라고 과거를 돌아보며 따져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우리는 곤경에 처했을 때야말로 앞을 보며 “이제부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는 과거의 ‘원인’이 아니라 현재의 ‘목적’을 본다. 인간은 과거의 원인에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우리는 모두 어떠한 ‘목적’을 따라 살고 있다. 그것이 목적론이다.

 

우리들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존재이다. 지금의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문제를 직시할 용기가 필요하다. 자유도 행복도 모두 ‘용기’의 문제이지 환경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인생은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이어지는 ‘선’이 아니라 점(點) 같은 찰나가 쭉 이어질 뿐이다.

 

지금, 현재의 순간에 내게 주어진 ‘인생의 과제’에 춤추듯 즐겁게 몰두해야 한다. 그래야 ‘내 인생’을 살 수 있다.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내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밖에 없다. 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p319

 

 

- 잘 생각하거나 따져 보지 않고 그냥 마구 읽기를 마치고~ 첫째 둘째 셋째로 구분하니~

 

책을 읽고 나서 감상을 기록하려고 하니 갑자기 생각이 멈추어 버린다. 읽고 나면 무엇인가를 느껴야 하는데 이렇게 막막하니 걱정이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에 많은 공감을 한다.

 

그 동안은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않으려고~ 그리고 싫은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엄청스럽게 조심하고 조심하였었는데~ 미움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또 다른 새로운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미움 받을 용기를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크게 3가지가 있었다.

 

첫째 자기 자신은 고쳐가면서 변화해 가는 것이다. 둘째 분노 이외의 커뮤니케이션이 있다. 셋째 행복해지려면 미움을 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첫째 자기 자신은 고쳐가면서 변화해 가는 것이다. 청년은 친구의 밝은 성격과 많은 사람과 만나면 만나는 사람과 함께 재미나게 지낼 수 있는 외향적인 성격을 좋아하면서 자신은 사람도 못 사귀고 비뚤어진 데가 많은 인간이라고 자신에 대하여 비관적이었다.

 

그러자 철학자는 청년에게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고 또한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있으며 게다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고 있다고 꼬집어 말하였다.

 

그리고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인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환이 아니라 고쳐가는 것이라며, 문제는 과거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는 청년의 판단이고 책임이라고 말하였다.

 

 

둘째 분노 이외의 커뮤니케이션이 있다. 청년은 커피숍에서 웨이터가 실수로 옷에 커피를 쏟았기에 막무가내 큰소리로 화를 냈으며 분노로 인하여 이성을 잃고 말았다고 하였다.

 

그러자 철학자는 큰소리를 내지 않고도 말로 설명하면 웨이터는 정중하게 사과했을 테고, 옷을 닦아주거나 세탁소에 옷을 맡겨서 조치를 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큰소리로 화를 내고 분노라는 감정을 동원하여 웨이터를 굴복시키려고 한 것이라고 질타하였다.

 

분노라는 도구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참을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분노 이외의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욱해서”라면서 분노를 매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였다고 한다.

 

분노를 제어하는 것이 ‘참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분노란 어차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도구니까. 분노란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고 아울러 화내지 않는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셋째 행복해지려면 미움을 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들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존재이다. 지금의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생에 놓인 문제를 직시할 ‘용기’가 필요하다. 자유도 행복도 모두 ‘용기’의 문제이지 환경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다.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미움 받을 용기’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