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책(冊)

장자 / 최효선 역해 / 고려원

물조아 2014. 6. 23. 16:38

 

장자 / 최효선 역해 편집위원 신승하 이강수 이동향 / 고려원

 

노자는 “학문을 한다는 것은 날마다 불어남이요 도를 배운다는 것은 날마다 줄어듦이다.”

 

소요(逍遙) 마음 가는 대로 유유히 생활하는 모양, 아무것도 구속받지 않고 이리저리 자유롭게 노닌다.

 

큰일을 하는 데에는 그만큼의 준비과정과 또 그 일을 감당할 만한 도량이 갖춰져야 한다.

 

노장사상에서 일반적으로 일컫는 무위인데 이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말이다. 인간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자기를 부정하고 공을 부정하고 명을 부정하는 것이다.

 

장자는 세상의 상식과 관습에 매몰되어 구속된 삶을 살지 않고 높이 비상하여 일체의 차별과 대립이 본래 하나인 만물제동의 세계, 무한한 자유의 경지에서 유유히 소요를 즐기는 참된 인간을 지인, 신인, 성인이라고 불렀다.

 

평안하고 만족스런 마음 상태의 실현이야말로 제한된 삶을 사는 인생의 최고 목표이리다.

 

심신의 수양을 쌓으면 우주의 위대한 생명력을 얻어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경지에 이르며 무심무아한 대자재의 자유를 얻는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밖에서 혹은 위에서 지배하는 절대자, 즉 진재(眞宰)! 진재(眞宰)란 다름 아닌 스스로 그러한 바의 움직임, 즉 변화 그 자체인 자연의 무궁한 운행이 아닐까?

 

인간이 자연을 자연 그대로 받아들일 때, 인간은 일체의 것으로부터의 초월하여 참된 자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언어의 내용이 되는 의미가 불명확하면 언어는 언어로서의 기능을 잃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새새끼 울음소리의 무의미함과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된다.

 

그들은 각자의 주장에 대한 명확하고 진실 된 내용과 근거도 지니지 못하고 무조건 상대방을 반박하였으니 그것은 새새끼 울음소리와 한 치도 다를 바 없이 무의미하다.

 

최상의 지혜는 시비의 편견에 의해 해쳐지지 않은 자연의 지혜이며 인식의 한계를 알고 그 한계 밖에 머무르는 지혜이다.

 

자신의 존재란 잠시 육신의 형체를 지녔다가 다시 자연의 무한한 생성과정으로 편입되는 우주적 생명현상에 불과함을 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능적 공포가 사라지지 않을까?

 

인간이 자연과 하나임을 깨닫는다면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 의한 본질적인 부자유를 벗어나고 인간 스스로 자연을 대상화하여 자초한 비극성을 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인 자기를 잊고(忘我) 자연과 하나가 되어서 일체의 한계가 없는 절대적 세계에 몸을 두어야만 무한한 우주 속에서 자유롭게 노닐 수 있다. 자기를 잊기 위해서는 자기를 아는 수밖에 없다.

 

인간의 운명을 사소한 데까지 따져 고락함이 없이 호랑나비로서 즐기고 장주가 되면 장주로서 그 뜻을 펴는 것처럼 자신이 처한 그때에 자유 자적해야한다.

 

세속과의 분쟁을 최소화하고 스스로 자기의 자유스러운 생활을 즐기는 것이 양생의 비결이다.

 

자기의 마음을 무심의 경지에 노닐게 하여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필연에 몸을 맡기고 자기 내부의 본성을 길러 나가는 것이 최상의 처세법이라고 한다.

 

도를 체득한다는 것은 인간이 세속적인 가치관, 상대적 편견을 초월하여 자기 안에 절대자유의 세계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하늘이 하는 일을 알아서 자연 그대로 살아가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알아서 지식이 아는 바를 가지고 지식이 못하는 바를 키워 나간다면 그는 사람으로서 최고의 지혜에 도달한 사람이다.

 

자연은 나에게 형체를 부여하고, 삶을 주어 수고롭게 하고, 늙게 함으로써 편안한 날을 보내게 하고, 죽음으로써 휴식을 하게 하였으니 내 삶을 좋은 것이라 함은 내 죽음도 좋은 것이라 여긴다.

 

우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생성 변화한다. 그 흐름 속에 문득 형체를 얻어 지구라는 땅에 발붙이게 된 우리의 생명 또한 시작과 끝을 가진 일회적 존재가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한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어쭙잖은 인간의 유한한 지식으로 무한히 변전하는 세계를 재단하는 것은 위험천만한일이다.

 

장자는 인식의 통일성과 체계성보다도 살아 있는 혼돈의 비합리와 무질서를 사랑한다. 그는 다만 생명 없는 질서보다 생명 있는 무질서를 사랑한다.

 

인의와 예악의 가르침은 인간의 본래적 모습을 돌이켜 볼 때 모두 무익한 잉여물이며 인간의 편안한 삶을 어지럽히는 망령된 분별이다. 이것들은 인간이 자신이 만든 것이었지만 인간의 손을 벗어나서 오히려 인간을 해치는 도구가 되고 있다.

 

인간본래의 자연, 모든 것을 타고난 것이라고 여기고 생존의 조건을 긍정하면 마음을 괴롭히는 일 없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품에 깃들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야말로 참된 아름다움이고 진실이며 자연에 가해진 모든 인위적인 작위는 위선이다.

 

소박한 평화를 누리고 있던 사회에 인의예악이라는 문명의 굴레를 들고 출현한 성인이 인간의 마음에 의혹을 심어 주기에 이르렀다.

 

마르크스와 더불어 탁월한 사회주의 학자인 엥겔스는 인류가 원시사회에서 문명사회로 진입한 것은 커다란 역사 진보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일종의 추락, 즉 고대 씨족 사회의 순박한 도덕의 최고봉에서의 추락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노장에서 말하는 도의 중요한 가르침은 내부의 힘으로 모든 감각의 유혹을 벗어나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깥 세계를 찾아해매는 집착, 외물의 굴레로부터 놓여나는 것이다.

 

눈에 티가 들어가거나 모기에게 쏘인 것 정도의 작은 일에도 괴로움을 당하는데 하물며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을 결박하는 인의 때문에 겪는 고통이야 말할 나위가 없다.

 

참된 의미에서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세속적인 욕망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은 영달과 빈궁으로 인해 자기의 즐거움이 좌우되지 않으므로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번민이 있을 수 없다. 홀로 몸을 바로 하여 자기의 본분을 지키고 타고난 본성으로 돌아가기에 힘썼을 뿐이다.

 

사물의 분량은 끝이 없고 시간은 그치는 법이 없다. 또 만물에 부여된 운명은 늘 변화하게 마련이므로 처음과 끝은 순환해서 한 곳에 고정하는 법이 없다.

 

사람이 살고 있는 시간은 태어나기 이전의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가장 미세한 것은 형태로 포착할 수 없고 가장 큰 것은 이를 쌀 수가 없다. 천지가 지극히 큰 세계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도 일체를 자연에 순응하여 인위적으로 인간의 생명이 자연스럽게 살아 나가는 것을 파괴하지 말고, 자신의 자유로운 생활을 희생하면서 명리를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으로 이렇게 할 때 인간은 자기의 진실한 면목을 회복할 수 있다. 명리[名利] 세상에서 얻은 명성과 이득

 

사소한 자기의 지식을 믿고 일면적인 진리를 완벽한 진리인 듯 고집하는 인간, 그들은 자기의 모자람을 부끄러워하는 대신에 자기가 모르는 것은 무조건 비웃는다. 논쟁에서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에만 만족해 있는 당신이 우물 안 개구리와 다를 바가 있는가.

 

무심이야말로 최대의 무기이다. 대개 참다운 용기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는 무턱대고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무리하게 허세를 부리는 일이 없다. 속이 충실한 자는 겉을 꾸미는 일이 없다.

 

인간의 자유란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하나의 필연으로서 주어진 자기의 삶을 남이 아닌 자기의 삶으로서 살아가고 죽음 또한 자기의 죽음으로서 죽어가는 자유이다. 또 주어진 자기의 현재를 자기의 현재로써 성실히 살아가는 자유이다.

 

아무리 사소한 도움이라도 도움을 받는 사람이 절박하게 그 도움을 필요로 했을 때에는 큰 은혜를 입은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모든 일은 시의적절해야만 되는 것으로 때를 벗어나고 정도에 넘치는 일은 아니함만 못한 것이다.

 

《열자》 《한비자》에도 나오는 양자는 전국시대에 철저한 개인주의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자기 털 한 올을 뽑아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하더라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인생의 덧없음이 느껴질수록 더욱 전원생활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래서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같이 은둔하여 전원생활을 즐기는 것을 예찬한 시구절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깊은 감명을 받고는 한다.

 

그리고는 푸른 하늘과 햇살에 반짝이는 연초록의 잎사귀를 바라보며 괜스레 눈물짓기도 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뼈 속 깊이 절절히 느낄 만한 나이가 되면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세상을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연의 이법도 터득하게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