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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살리며 돈도 벌자는 게 생명자본주의”

물조아 2013. 12. 15. 09:43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3.12.15 03:59 팔순 맞아 『생명이 자본이다』 펴낸 이어령

  

          

  

“생명이 자본이다.”

‘팔순 현자’가 평생 아껴뒀던 깨달음을 쏟아냈다. 문명과 통섭 그리고 신앙에 이르기까지 거대 담론들을 메스처럼 날카롭게 분석해 온 이 땅의 대표적 지성 이어령(79·중앙일보 고문ㆍ사진) 초대 문화부 장관. 그가 이번엔 생명과 사랑의 ‘향연’을 펼쳐보였다. 천박한 금융자본주의가 횡행하는 작금의 세상. 이 암울함을 뚫고 나가려면 생명을 밑천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그의 외침이다. 삶의 황혼기 팔순. 이 나이에 펄펄 튀는 생명을 노래하는 건 무슨 까닭인가. 그가 주창한 ‘생명자본주의’를 논한 책 『생명이 자본이다』의 출간에 맞춰 11일 그 사연을 들었다.

 

-생명자본주의란 뭔가.

“학교에서 개념을 안 배워도 아는, 평이한 우리말로 표현하는 게 훨씬 이해하기 쉬울 때가 많다. 경영은 사람을 살리고 살아가는 것, 즉 살림살이라고 풀어내면 알기 쉽다. 금융도 ‘돈 놓고 돈 먹기’라고 쓰면 이해가 빠르다. 마찬가지로 자본이 뭔가. 바로 밑천이다. 자식이 밑천이란 말도 있지 않나. 생명을 밑천 삼아 살아가는 게 생명자본주의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남이섬에 가면 메타세쿼이아라는 나무가 있다. 섬 주인은 가로수로 유명한 이 나무를 심어 섬을 관광지로 개발했다. 요즘 관광객들이 몰려와 나무 밑에서 사진을 찍으며 엄청난 돈을 벌어다 준다. 옛날엔 나무를 잘라서 장작을 만들어야 가치 있는 거였다. 그러나 이젠 나무를 심고 가꿈으로써 가치를 창출해 낸다. 산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진 산에 동굴을 파고 금과 석탄을 캐내야 했다. 산을 죽이는 일이다. 그러나 강원도에 가보라. 광산을 파는 대신 산을 울창하게 살려 등산객을 유치한다. 이처럼 생명을 살려 기쁨과 감동을 주고, 그러면서 돈도 벌자는 거다.”

 

어항 속 얼어붙은 금붕어가 준 충격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2008년 5월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를 보면서 서양식 자본주의, 특히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위기감이 들었다. 한국은 개화기 이래 서양식 선진국의 대열에 끼이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서양의 자본주의는 결국 시스템 붕괴로 귀결됐다. 이는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다. 이대로 두면 자식들이 어떻게 되겠나. 위기 상황에서는 새 지향점이 필요하다. 나는 그때 생명과 사랑에서 답을 찾았다. 지금까진 불과 기계의 문명이었다. 그러나 이제 물과 생명의 문명이 돼야 한다.”

 

-리먼브러더스 사태에서 무엇을 느꼈나.

“금융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봤다. 스페인이 왜 망했나. 노마크 찬스에서 남미 대륙을 발견한 탓이다. 원주민과 같이 살았으면 최강의 나라가 됐을 거다. 그러나 원주민을 다 죽이고 금만 챙겼다. 제조업도 농업도 할 필요가 없었다. 양말도 만들 줄 몰랐다. 포르투갈도 똑같았다. 은광을 발견해 왜 일하느냐고 했다. 그래서 포르투갈·스페인 모두 망한 거다. 이게 금융자본주의의 폐해다.”

 

젊은 날부터 이어령 전 장관에게 생명은 지고지선의 가치였다. 그가 생명의 존엄성을 절감한 건 살을 에는 추위와 금붕어 때문이었다. 신혼 초였다. 삶의 고단함에 곯아떨어져 연탄불을 꺼뜨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기르던 금붕어 세 마리가 어항 속에서 꽁꽁 얼어붙었다. 절박함에 무조건 물을 데워 부었다. 그러자 기적처럼 얼어붙은 금붕어들이 살아 헤엄치는 게 아닌가. 그때 청년 이어령은 아내에게 맹세했다. “여보, 다신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으리다.” 고귀한 생명을 다시는 위험에 빠뜨리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이렇게 깨어난 생명에 대한 외경은 50여 년간 그의 가슴 깊숙이 지탱돼 왔다. 그러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목도하면서 생명이란 화두에 불이 붙었다고 했다.

 

-서구식 기계문명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동양에선 먹고사는 게 중요하다. 사람 수도 먹고 사는 입으로 센다. 인구(人口)도 그렇게 나왔다. 심지어 같이 일하는 소나 머슴도 생구(生口)라 한다. 먹고사는 게 생명의 요체임을 알았던 거다. 반면에 서양에선 인두세란 표현처럼 머리 수로 따진다. 또 노동을 사유의 대상에서 배제했다. 프랑스의 여류 철학자 시몬 베유는 이랬다. ‘고대 희랍인들은 철학과 예술·스포츠는 알았지만 노동의 의미는 몰랐다. 먹고사는 것과 관계된 노동은 노예에 의존했다. 결국 이들은 노예의 노예였던 셈이다’. 그런데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더 이상 노예에 의존할 수 없게 되자 기계가 이를 대신한다. 그러면서 사랑과 생명이 죽은 물질과 시스템으로 뒤바뀌는 상황이 발생한다. 차도가 인도를 밀어내듯 기계가 생명의 우위에 서는 세상이 펼쳐지게 된 거다. 배가 고프든 안 고프든 무조건 낮 12시만 되면 점심을 먹어야 하는, 자율성보다 시스템이 더 중시되는 상황도 빚어졌다.”

 

생명은 평생 아끼고 아껴둔 화두

-팔순이 돼서야 생명을 논하게 됐는데.

“미당 서정주의 ‘시론(詩論)’이란 시가 있다. ‘바닷속에서 전복 따 파는 제주 해녀도/ 제일 좋은 건 님 오시는 날 따다 주려고/ 바닷속 바위에 붙은 그대로 남겨둔단다…’. 나에게 생명이란 주제는 최고의 전복이었다. 이 나이까지 아끼고 아껴왔다. 그러다 나이 든 해녀처럼 그 좋은 전복이 어디 있는 줄 알면서도 물 속에 들어가지 못할 처지에 몰리고 있다. 그래서 어린 해녀들에게 생명이란 제일 좋은 전복이 어디 있는지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생명자본주의를 날치로 비유했다. 설명은 이랬다. 물고기는 바다에 살면서 바다를 보지 못한다. 바다를 본 물고기는 어부에게 잡혀 곧 죽을 물고기뿐이었다. 그러다 더 큰 놈에게 잡혀먹히게 된 물고기가 물에서 튀어 오르기 시작한다. 더 멀리, 더 높이 비상하기 위해 지느러미는 날개처럼 변한다. 날치는 물에서 튀어나와 바다를 보고, 그러곤 다시 수면 밑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죽진 않는다. 결국 “날치도 워낙 궁하니까 방향을 바꾼 것”이라며 “위기의 체제가 살아남기 위해 변신한 게 생명자본주의”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생명자본주의가 한국에서 잘될까.

“잘될 걸로 확신한다. 일본의 인구는 한국의 세 배다. 그러나 등산객은 훨씬 적다. 자연을 제대로 쓸 줄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의 등산 인구는 일본의 두 배라고 한다. 왜 한국보다 등산을 하지 않는가. 생명자본주의를 모르는 탓이다. 우리는 생명자본주의의 전통이 강하다. 생물학엔 ‘생명애(biophilia)’ ‘장소애(topophilia)’ 그리고 ‘창조애(neophilia)’란 개념이 있다. 살아있는 피조물을 사랑하는 게 생명애다. 우리 조상들은 생명에 대한 정이 많았다. 서양인들은 구두를 신고 다녀 벌레들이 밟혀 죽는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여름이 되면 짚신 바닥을 바짝 조여 맨 ‘십합혜’ 대신 느슨하게 한 ‘오합혜’를 신었다. 땅의 미물들을 살리기 위함이다. 장소애는 고향과 같은 특별한 장소에 대한 사랑이다. 한국인들은 설날·추석이 되면 모두 고향을 찾는다. 끝으로 창조애는 새로움을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특성을 뜻한다. 한국인들은 사자 아닌 호랑이의 성격이다. 사자는 배만 부르면 늘어지게 잠만 잔다. 그러나 호랑이는 다르다. 늘 깨어있는 채 달리고 달린다. 이런 특성들을 종합할 때 우리에겐 생명자본주의를 잘해 낼 소양이 많아 보인다.”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namj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