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쉴 수 있어 (感謝)

'편안한 죽음'을 가로막는 2가지 문제 '사랑과 돈'

물조아 2014. 1. 28. 23:48

“과장님, 어머님께서 호흡이 방금 멈추신 것 같아요.”

성희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사람은 호흡이 멎고 조금 있다가 심장이 멈춘다. 현대의학은 심장이 멈출 때가 ‘사망’이다. 병원으로 빨리 가야했다. 집에서 병원까지 50분은 걸리는 거리지만 새벽이라 차가 밀리지 않아 20분 만에 도착했다. 밤새 엄마를 지킨 남동생의 얼굴이 그리 힘들어 보이지 않아서 일단은 안심이다. 4일전, 엄마를 임종실로 모셨다. 일하는 낮 시간 동안은 내가, 퇴근해서 밤 시간동안은 남동생이 교대로 간병을 했다. 환자를 돌보다가 틈나면 엄마를 돌보다가 그랬다.

호흡이 멈춘 엄마는 하얗게 변했고, 4시 35분에 심전도 모니터는 수평선을 그렸다. 임종실로 모셨을 때부터 마음의 각오는 단단히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오자 호스피스의사인 나도 두려웠다.

 

남동생과 나는 엄마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서 나란히 앉았다.

“누나, 엄마가 돌아가신 분 같지가 않아. 그저 잠자는 것 같지? 아직 따뜻해서 금방이라도 눈을 뜨실 것 같기도 하고. 하옇튼 누나 고마워. 엄마를 편안하게 해주어서.”

“그러게 말야. 그런데…우리엄마…참… 예쁘네.”

우리는 어느 새 병실에서 환자보호자들이 임종실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서로에게 서로를 위로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평화로운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쳐다보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사람들은 불치의 병에 걸려 호스피스병동에 오게 되면 두 번을 슬피 운다. 입원하는 날과 임종실로 옮기는 날이다. 입원하는 날에는 환자가 이제는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없구나 해서 서글피 울고, 임종실로 옮기는 날에는 가족이 이제는 진짜 가는구나 해서 구슬피 운다. 그래도 덜 힘든 사람들은 있었다. 마지막이다 싶으면 진짜 최선을 다하는 가족들이었다. 떠날 사람은 남아 있을 이를 위해 살다 남은 삶을 살아가고, 남아 있을 사람은 떠날 이가 세상에서 사랑받다가 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도록 하면 그래도 좀 쉬워 보였다.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삶의 갈등은 분명히 죽음 앞에서 쪼그라들기는커녕 고무풍선처럼 부풀어진다. 그러다가 터지기도 한다. 죽음에 직면해서도 문제의 중심은 ‘사랑과 돈’ 이다. 거기다 종교 문제까지 있으면 소통부재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폐암이 머리뼈부터 골반뼈까지 빼꼭하게 전이됐다. 엄마는 딸이 호스피스의사임에도 불구하고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 하셨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입원을 했고, 통증 치료를 받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호스피스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에서 받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나를 거쳐 간 다른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엄마의 죽어감’ 속에서 숨겨진 갈등을 녹이기 시작했다. 종기는 곪아서 터져야 낫지 않는가. 가족 간에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면서 펑펑 울기도 했다. 그리고 엄마가 떠났다.

 

‘죽음’은 한 순간이다. 환자들의 얼굴이 보톡스 주사를 맞은 것처럼 주름이 풀리고 편안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어려운 과정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죽음보다 더 어려운 것은 죽어감이었다. 호스피스 일의 중심은 죽음이 아니라 죽어감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이다. ‘죽어감’은 녹이는 과정이다. 그 힘든 일을 죽음이 다가온 환자가 혼자서 할 수는 없다. 남겨진 사람들이 환자와 같이 잘 녹여야한다. ‘팬티 한 장도 가져갈 수 없음’을 제대로 안다면 돈에 대한 집착은 조금 풀릴 것이며, ‘누구나 마지막에는 혼자 간다’는 것을 안다면 사랑에 대한 집착도 적당히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떠난 아버지 옆에 엄마를 고이 모셔 두고 오던 날, 우리들은 ‘살아가는 법과 죽어 가는 법’을 제대로 배우고 있었다.

   

(사망기록서)

  

‘쥑’이는 여의사 김여환의 행복처방 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