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의 한국” / 돈 오버더퍼 / 길산 (사진: 평양의 야경)
강력한 지배체제를 통해 고도의 중앙집권화를 도모했던 이남의 박정희 독재정권과 가공할 만한 개인숭배와 자주성에 기반을 둔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폐쇄적 사회를 건립했던 북한.
북한에는 1백 10만의 북한 병력이 있고, 남한에는 66만 명의 남한 병력이 있고, 주한미군이 3만 7천명이 주둔해 있다.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한반도 전쟁으로 인하여 중국군은 90만 명, 북한군은 52만 명, 유엔군은 40만 명(이중 3분의 2 이상은 남한 국군이다), 미군은 3만 6천 명이 숨졌다. 당시 남북한 합산 총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3백만 명이 죽거나 부상, 또는 실종됐고, 5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1972년 7월 4일 남북한 공동성명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행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해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
박정희 정권 하의 남한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대미의존도가 높았다. 박정희는 미국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을 불만스럽게 여겼고,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독립성을 지키고자 분투 했던 것처럼 자주성 확보를 부단히 노력했다.
95년 3월 한 일간지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3분의 2 이상이 남한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박정희를 꼽았고 그 수치는 다른 대통령들에 비해 무려 5배가 넘는 압도적인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그의 집권 당시 이룩한 경제성장과 사회적 안정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경제 정책과 관련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는 했지만 개인적 치부는 하지 않았고 부정부패와도 거리가 멀었다.
세계은행의 분석에 따르면 남한의 GNP는 박정희 집권 후부터 매 10년마다 3배 씩 증가해 보통 1백 년이 소요돼야 할 만한 경제성장을 단 30년 만에 이루어냈다.
1965년에는 전체 가구의 40% 이상이 빈곤선 이하의 수준으로 생활했지만 80년에는 전체 가구의 10% 이하로 줄어들었다. 당시 1백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던 1인당 국민소득도 1980년 즈음에 1천 달러를 넘어서고, 오늘날에는 1만 달러를 상회한다.
1974년 11월 주한 미 대사관은 남한은 “핵개발 계획의 제1 단계를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라는 1급 기밀을 본국에 타전했다. 박정희은 75년 6월 초 “남한은 이미 핵무기 개발 능력을 보유했지만 핵개발 계획에 착수하지는 않았다.”
이어 박정희는 미국의 지속적인 지원을 당부하면서 “미국의 핵우산이 철수될 경우 우리는 자구책으로서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다.”
60년대 초반 북한은 내수위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면서 국내에서 중공업 부문을 육성하는데 주력했고 외국과의 거래를 꺼렸다. 이에 반해서 남한은 미국 유학파 경제 전문가들이 경제정책을 주도 했고 미국과 일본 시장의 점유를 일정부분 약속받은 가운데 수출과 경공업에 주력하는 대외 지향적 경제 노선을 채택했다.
81년 레이건은 능란한 언변을 발휘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한과 미국은 자유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본인이 오늘 이 자리에서 한국인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자유와 우의에 기초한 한미 양국의 특별한 유대 관계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돈독하다는 사실이다.”
전두환은 “우리 정부와 군은 본인이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귀국의 대통령에게 확실히 해두고 싶다. 우리는 귀국 정부와 충분하게 의견을 조율하기 전에 섣부른 조치를 취할 생각이 없다.”
1950년 김일성의 남침에도 역시 소련 정부의 사전 승인과 지원 약속이 있었다. 그리고 김일성은 1952년 이미 협상을 통해 전쟁을 중단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전쟁을 포기하지 말라는 스탈린의 압력 때문에 그로부터 1년 이상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한 지 2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소련 정부는 기존의 입장을 번복해 비밀리에 김일성에게 전쟁 중단 지령을 내렸다.
미국이 남한 땅에 처음으로 핵무기를 배치한 것은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미국 정부의 문건에 따르면 72년 남한에 배치된 핵탄두는 총 736개로 사상 최고 규모였다. 1976년 카터 행정부가 남한에 배치한 핵탄두 수를 250기로 감축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1989년 부시 행정부 출범 당시 남한에 배치된 핵탄두 수는 약 1백 개였다.
잔존 핵무기는 대포용 핵탄두와 핵중력폭탄으로 군산 공군기지에 보관돼 있었다. 91년 남한에 있던 원자포가 모두 철수되고 공중 포격용 핵탄두 약 60개만 남게 됐다. 91년 12월 핵무기 철수가 완료되자 노태우는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 그 어디에도 핵무기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공식 발표를 했다. 끝.
사진출처: '09.12.24 '11.6.19 2012.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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