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쉴 수 있어 (感謝)

"유성룡 징비록(懲毖錄)의 통찰은… 적개심만으로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

물조아 2014. 10. 12. 20:38

"유성룡 징비록(懲毖錄)의 통찰은… 적개심만으로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의 '임진왜란 다시보기'

임진왜란 되돌아본 징비록

유성룡, 조선의 문제점 분석… 오히려 日서 더 열심히 연구

조선은 전쟁 끝난 후에 잊어 40년 뒤 병자호란으로 굴욕… 역사 잊은 민족에 미래 없어

 

플라톤 아카데미가 주관하는 '인문학 아고라: 어떻게 살 것인가' 세 번째 강연이 지난달 30일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렸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가 '임진왜란: 과거를 징계하여 훗날을 대비하다'란 제목으로 강의했다. 내용을 요약해 소개한다.

 

영화 '명량'으로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난중일기' 외에 이 시기를 돌아본 중요한 문헌 중 하나는 서애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懲毖錄)'이다. '징비(懲毖)'란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그것을 징계해서 훗날 환난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에서 따왔다.

 

징비록은 7년에 걸친 참혹한 전쟁을 기록하면서 무자비한 일본의 만행을 성토하는 한편, 그런 비극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지적한다.

 

유성룡은 당시 영의정이면서 전쟁을 책임지는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하고 있었다. 이순신을 알아보고 정읍현감이란 미관말직에서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게 유성룡이다.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주자학뿐 아니라 양명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병학, 의학에도 해박했다.

 

한명기 교수는 '징비록'을 통해 과거 역사를 읽고, 미래를 대비하는 혜안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사를 공부하는 건 오늘을 이해하기 위함(鑑古所以知今)"이라는 얘기다. / 고려대 제공

 

임진왜란 부르는 명칭 한·중·일 다 달라

 

임진왜란은 명칭 자체가 일본 침략에 대해 반성하라는 적개심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일본 교과서는 이를 '분로쿠 게이초 시대 전쟁(文祿慶長の役)'으로 쓴다. 분로쿠 게이초는 1592~1614년을 가리키는 일본 천황 연호. 그냥 그 시대 벌어졌던 전쟁이란 얘기다. 그나마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합한 다음부터 이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전에는 '삼한정벌(三韓征伐)'로 불렀다. 그런데 조선을 차지하고 난 뒤 자기 땅을 자기가 정벌한다는 게 앞뒤가 안 맞으니 바꾼 것이다. 중국은 그럼 어떻게 부르나. '항왜원조(抗倭援朝)'다. 철저하게 시혜자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들은 6·25 전쟁 역시 '항미(抗美)원조'라고 부른다.

 

임진왜란 전 유럽 해상권을 지배하던 포르투갈 선박이 마카오로 가려다 표류해 일본 규슈까지 온 적이 있다. 이때 핀투라는 상인이 서양식 소총 하나를 선물해주고 갔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은 서양 문물을 자기식으로 변형해 재창조하는 데 탁월하기 때문에 이를 조총(鳥銃)으로 개조해 대량 생산 체제까지 갖추는 데 성공했다.

 

1587년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국왕을 내 앞에 무릎 꿇려야겠다"고 다짐하고, 신무기 조총과 100년가량 내전을 겪으며 쌓은 풍부한 전투 경험으로 무장한 채 쳐들어왔다.

 

반면 조선은 반세기 가까이 훈구파와 사림파 간 무한 대립에 시달리면서 국력을 기르지 못했다. 명종 때 외척인 윤원형은 수락산을 통째로 사유화하고, 지나는 백성에게 통행세를 받아 축재했다. 조선은 이때가 역사적으로 보면 '중쇠기(中衰期)'였다. 더구나 일본을 '동해 끝에 있는 군더더기' '개돼지의 나라'로 간주했기에 이런 준동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을 세계에서 가장 무시하는 나라는 한국이다. 1995년 장쩌민 주석이 방한했을 때 일본 역사 망언에 대해 공동 대처하자고 했더니 김영삼 대통령이 한 술 더 떠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자"고 하는 바람에 통역사가 당황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2년 뒤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됐을 때 들어온 외채 중 일본 은행이 꿔준 게 가장 많았다.

 

                                        서애 유성룡의 초상화.

 

철저히 자국 이해 관계 따라 움직인 중국

 

명나라는 조선의 간청으로 참전하긴 했으나, 이는 일본군이 북진하면서 자국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6·25 전쟁 때 중공군이 참전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미군이 북진을 거듭, 중국까지 진격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명에서 파견 온 장수 이여송은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에서 왜군을 제압했다. 여세를 몰아 파주까지 추격했으나 무거워 이동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대포 부대 없이 기마 부대만으로 맞서다가 백병전에서 날카로운 일본 장검에 호되게 당하고 개성으로 숨어버렸다.

 

유성룡은 이에 다시 반격해야 한다고 매일 채근했으나 명군은 번번이 거절하는 건 물론, 자꾸 귀찮게 하면 곤장으로 다스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기에 이른다. 자주 국방을 갖추지 못한 나라의 굴욕을 보여준다.

 

임진왜란은 전체 7년 중 4년을 강화 협상으로 보냈다. 울산이나 부산, 거제 등지에는 왜군이 장기 거주하기 위해 쌓았던 성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이 왜군들이 장기 체류하는 동안 각종 문화재와 물자를 약탈하는 바람에 백성들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의병들이 이따금 어슬렁대는 왜군을 공격하자 일본은 명나라에 따져 "협상 중에 공격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면서 통행증(심유경 표첩)을 받아내기도 했다. 거기에는 '이 표첩을 소지한 일본군을 조선 관민이 공격하면 엄중 처단한다'고 써 있었다. 명은 이른바 '양전음화(陽戰陰和)', 낮에는 싸우는 척하지만 밤에는 화친한다는 속셈이었다.

 

임진왜란 교훈을 계승 못 한 조선

 

임진왜란 당시 조정에서 군사나 병무를 아는 유일한 존재는 유성룡이었다. 유성룡은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장기적으로 전쟁 후유증을 회복하고 침략받지 않는 나라로 재건하기 위해 뭘 해야 하는가 고민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뒤 화기(火器)와 병법(兵法)을 도입하고, 직업 군인제를 창설했으며, 무역이나 통상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려 애썼다. 왜군 포로를 포섭해 조총 제조법을 익혔고, 명나라에서 신형 대포나 독화살 제조법도 배우려 했으나 잘 가르쳐 주질 않아 애를 먹었다.

 

징비록은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쓰여졌으나, 이후 이 정신은 계승되지 못했다. 전쟁 당시에는 병사는 고사하고 군량 보급 인력조차 부족하자 "나라가 망하면 노비가 다 무슨 소용이냐"면서 노비들을 면천(免賤)해 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셌다. 명나라 장수도 "조선에는 노비가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노비 제도 개혁 논의는 눈 녹듯 사라졌다. 강군(强軍) 양성 논의도 흐지부지됐다. 위기가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자 과거의 기억과 개혁 의지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40여년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조선은 한 번 더 외세에 의해 굴욕을 맛봐야 했다.

 

징비록에 대해 주목한 건 오히려 일본이었다. 17세기 초 부산에는 왜관 외교 사무실이 있었는데 이곳은 일본인이 조선과 교류하고 무역하면서 정탐하는 전진 기지였다. 누군가 왜관 사무실에 국가 기록인 징비록을 넘겼고, 일본은 이를 조선보다 더 열심히 연구했다. 1712년 일본에 갔던 통신사가 오사카 난전에서 징비록이 팔리고 있는 걸 보고 경악했다고 한다.

 

새로운 징비록이 필요한 오늘

 

2012년 아리랑 3호를 발사하면서 한반도가 들떴다. 땅에 있는 자동차 번호판까지 식별할 수 있다는 자랑을 늘어놓았으나, 그 추진체 로켓은 일본 미쓰비시가 개발해 판 것으로 발사 자체도 규슈 남쪽 다네가시마 섬에서 이뤄졌다. 포르투갈 선박이 표류해 일본에 조총을 전해준 바로 그곳이다. 또한 2012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20년 되는, 60갑자가 일곱번 돌아온 해였다.

 

유성룡은 조선의 지정학적 환경이 '복배수적(腹背受敵)', 배와 등 양쪽에서 적이 몰려오는 처지라고 판단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 주변 강대국에서 권력 교체가 일어나면 한반도는 전쟁터로 전락했다.

 

앞으로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유성룡은 이를 막기 위해 리더의 능력과 책임감, 비전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징비의 정신은 역사를 잊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단재 신채호도, 영국 처칠 수상도 그렇게 말했다.

 

2012년 잠실운동장에서 한·일 국가대표 축구 경기가 열렸다. 붉은 악마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현수막을 들고 나오자 일본 응원단은 욱일승천기로 맞섰다. 축구협회에서 둘 다 압수하자 한국 응원단은 이순신과 안중근 영정을 등장시키기까지 했다. 그런데 얼마 후 방송을 보니 서울 양재동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관리 부실로 건물 곳곳이 훼손되고 유물이 엉망으로 보관되고 있는 화면이 나왔다.

 

징비록은 일본의 장점과 함께 조선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단순히 적개심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을 유성룡은 안 것이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중국인 역사 소설가 진순신은 '청일전쟁'이란 작품에서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이 일본으로 건너와 리홍장이나 이토 히로부미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장면을 묘사한다. 그는 김옥균은 이들이 아니라 조선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과 손을 잡았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조선의 운명을 리홍장이나 이토 히로부미에게 맡길 것인가, 전봉준과 함께 갈 것인가.

 

격동하는 한반도 주변 환경 속에서 바깥 세계를 파악하고 외교에 역량을 기울이는 건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에 앞서 내부를 통합하고 내부 역량을 키우는 데 더 노력해야 한다. 외교나 교섭의 힘은 한 나라 자체 국력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Weekly BIZ [지식 콘서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