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쉴 수 있어 (感謝)

價値觀의 혼돈

물조아 2014. 9. 16. 13:11

 

 

국가·정부에 모든 책임 물으면서 권위와 엄중함은 전혀 인정 않고

구성원 견해 아닌데 總意랍시고 큰 목소리에 이끌려 강경 기조로

다음 세대에 配慮 안 가르치는데 이 나라 先進化 어찌 기대하겠나

 

지금 우리는 심각한 가치관의 혼돈에 빠져 있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어느 쪽이 바른길인지의 판단 문제는 고사하고 상호 모순되는, 때로는 정반대의 가치관이 한몸에 공존하는 어지러운 상황이다.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세월호'에 묶여 5개월을 허송하는 정치, 성장과 복지 사이에서 하루걸러 왔다 갔다 하는 경제, 한류(韓流)를 자랑하면서 국제적 무례(無禮)를 서슴지 않는 문화, 세계의 기아와 폭정에 눈물 흘리면서 북한 땅의 굶주림과 인권에는 눈감는 의식구조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나라'를 우습게 여기면서도 나라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줄 것을 요구한다. 나라나 정부를 걸핏하면 '개판'을 만들면서 툭하면 "이것 해내라, 저것 해내라"라고 한다. 모든 것이 나라 책임이고 정부 탓이고 대통령 잘못이라면서 자신들은 정작 나라의 무거움과 대통령 자리의 엄중함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걸핏하면 민주주의나 의회주의를 내세우면서 민주주의의 기본 룰 중 하나인 타협과 양보, 다수에의 승복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국회가 그 모양이니 지킬 국민이 있을까 싶다. 법질서와 시민의식을 부르짖으면서 광장을 이용하는 규칙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다. '세월호'라는 마패만 있으면 대한민국의 어느 법도 무시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남이 교통규칙을 안 지킨다고 시도 때도 없이 경적을 울려대면서 정작 자기는 차선을 위반하고 신호를 무시하고 담배꽁초를 버린다.

 

민주주의에서 총의(總意)에 의한 것이면 만사형통이라는 인식은 과연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개인의 의사를 개별적으로 물어보면 '배가 바다로 가는 것'이 맞는데 이상하게 총의에 부쳐지면 '배가 산(山)으로 가는 것'이 요즘의 대한민국식(式) 민주주의다. 자기 생각은 다른데 공개적 토의에서는 다수에, '큰 목소리'에 이끌려 자기 생각을 접는다. 정당의 의원총회, 유족 또는 유사한 시민단체의 총의는 항상 이렇게 구성원의 견해와 상관없이 강경하게 흘러가고 있다.

 

주간조선 최근호에는 여름 영어캠프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공항에 도착한 한국 초등생 100여명과 그 부모들이 입국심사대에서 당당하게(?) 새치기를 하는 낯뜨거운 장면을 목격한 글이 실렸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말도 안 통하고 규칙도 잘 몰라 외국인들 앞에서 쭈뼛쭈뼛하며 주눅 들어 하던 한국인들을 그 빠른 시간에 이처럼 안하무인 격으로 변모시킨 요인은 무엇인가? 그런 새치기 현상은 외국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거리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공권력과 정치권의 영역에서 더욱 활발하고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자신감도, 당당함도 아니고 스스로의 왜소함을 감추려는 일종의 허위의식일 수 있다.

 

청소년의 담배 피우기 등 일탈 행동을 나무라다가 목숨을 잃은 어른의 이야기는 더 이상 거론하기도 무섭다. 지하철 안에서 남녀 간의 외설적인 행동은 다반사고, 이제 그것이 보기 역겨우면 우리가 피해야 한다. 교사가 매 맞고, 상사가 테러당하고, 연애 막는다고 상대방 부모를 죽이기까지 하는 세태는 지금 우리 정치권과 사회 주변에서 일어나는 공권력의 함몰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물론 교사가 학생을 매질하고, 군(軍) 동료가 죽을 만큼 가혹 행위하고, 공권력이 부패해서 권위가 몰수당하는 이 사회의 병폐들도 문제다. 정치권이 표(票)에 눈이 어두워 온갖 아양은 다 떨어놓고 돌아서서 오리발 내미는 풍토가 우리 사회의 불합리와 허위의식을 증폭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나라가 모든 것을 다 해줄 것처럼 호들갑을 떤 것도 사실이다. 대통령이 감정 또는 이해득실에 이끌려 필요 이상으로 나서고 관여하는 일종의 포퓰리즘이 상황을 더 꼬이게 만드는 역작용을 했음을 뒤늦게 깨닫고 있겠지만 그것 역시 자업자득이다.

 

두려운 것은 이런 가치관의 전도랄까 의식의 모순성이 지금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중심 세력에 만연해 있고, 더 나아가 미래를 책임질 젊은 세대에서 자주 목격된다는 사실이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는 전문가들이 분석할 일이지만 교육에 그 원인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지금 공교육은 입시 교육, 취업 교육에 모든 코드가 맞춰져 있다. 공공 의식(public mind), 공동체 의식은 뒷전이다. 가정교육이 그 빈자리를 메울 수 있어야 하는데 가정에서의 교육은 어쩌면 공교육보다 더 많이, 더 깊이 '남 제치고 나 살기' 재주에 집중해 있는 듯하다. 자기 자식 감싸고 남 따귀 갈기는 것이 '교육'인 줄 안다.

 

자라나는 세대에 희생·양보·인내·배려·관용·타협 등 인간다운 삶의 본질 요소들을 가르치지 않는 나라에 진정한 선진화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거리에서, 직장에서, 조직에서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았음 직한 젊은 층을 찾기 힘든 사회에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절충되고, 서로 믿고 기다려주는 배려와 관용이 작동하는 정치가 나올 수 없다. 지금 우리의 미래는 회색이다.

 

김대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