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책(冊)

난중일기 / 이순신 지음 이은상 옮김 / 지식공작소

물조아 2014. 9. 25. 00:09

난중일기 / 이순신 지음 이은상 옮김 / 지식공작소 

해질 무렵, 영남우수사 원균의 통첩에 『왜선 구십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에 대었다』하였고,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서가 왔는데, 『왜선 삼백 오십여 척이 벌써 부산포 건너편에 와 대었다』고 하였다.

 

다음날 영남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크나큰 부산진이 벌써 함락되었다』했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길이 없었다. 즉시 장계를 올리고 삼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임진년(선조 25년)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불행 중 다행히 임진 1년 전인 1591년에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이순신을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제수 되었다. 더 더욱 다행은 나라에서 이순신을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다.

 

임란 중에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심중을 옮겨 보면,

 

밤기운이 몹시 차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라를 근심하는 생각이 조금도 놓이지 않아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온갖 회포가 일어난다.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라 일을 생각하니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홀로 수루 위에 앉았으니 온갖 정회가 그지없다.

 

그리고 이순신은 원균의 인간성과 능력을 잘 알고 있었는데, 말 가운데 원균 수사의 음흉하고 고약한 일이 많으니 그 허무맹랑한 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원수가 방해하려 한다고 했다. 가소롭다. 예로부터 남의 공을 시기하는 것이 이 같은 것이니 무엇을 한탄하랴. 하는 짓이 극히 흉악하였다.

 

저녁에 겸사복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 사연에 이르기를 『수군 여러 장수들 및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였다 하니 앞으로는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것이었다. 통탄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것은 원균이 취해서 망발을 부린 것 때문이었다.

 

원균의 일은 참으로 해괴하다. 날더러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했다니 이는 천고에 탄식할 일이다. 밤이 들면서 심사가 산란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근래에 와서 소문을 많이 전하는데, 그 소문이란 모두 흉인(원균)의 일이었다. 원균이 온갖 계략으로 나를 모함하니 이 역시 운수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에 잇닿았으며, 그렇게 해서 날이 갈수록 심히 나를 헐뜯으니 그저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하여 제가 감당치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건마는 조정에서 살피지를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음흉한 사람(원균)의 무고하는 행동이 심했건마는 임금이 굽어 살피지 못하니 나랏일을 어찌할꼬. 바깥 도둑을 못 없앤 이때 안 도둑이 이러하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협잡꾼들이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니 나랏일이 이러하고야 평정될 리가 만무하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중에 어머님을 잃어버리고 오직 나라를 위해 뼈와 살을 다 바쳤건만, 선조는 조정을 기망하고 왕명을 어겼다고 해서 통제사 직에서 해임 되고 투옥, 고초를 겪었다. 이순신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렇지만 정유재란의 와중에 옥에서 풀려나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했다. 그해 8월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함으로써 궤멸 상태에 이르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두 달 뒤 10월 25일 명량에서 13척의 배로 수 백 척의 일본 수군을 물리쳤다.

 

무술년(선조31년) 12월 16일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일본제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란의 칠년의 전쟁은 무수한 생명과 재산을 앗아가고 그리고 세세에 번쩍이는 역사의 면류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의 태양 이순신의 목숨까지 빼앗아 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