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책(冊)

채플린 / 데이브드 로빈슨 한기찬 / 한길아트

물조아 2013. 11. 16. 22:29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

 

무성영화시대 최고의 배우이자 감독인 찰리 채플린, 그는 각본, 감독, 주연, 음악 등 영화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다재다능함과 언어와 시대를 초월해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천부적인 연기력과 인간의 보편적인 삶에 대하여 접근하였고, 더불어 산업의 기계화에 따른 인간성을 잃어버린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인간성 회복을 희극으로 표현하였다.

 

찰리 채플린은 예능에 재능을 갖추고 있는 아버지 찰스 채플린(1863년 3월18일)과 어머니 해너 해리에트 페들링햄 힐(1865년 8월 6일)과의 사이에서 1889년 4월 16일 출생하였다. 그런데 채플린의 어린 시절에 있던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채플린은 아버지를 조용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곤 하는 까만 눈의 사나이로 묘사했으며, 어머니 해너는 아버지가 나폴레옹을 닮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채플린은 1899년과 1900년 경 『신데렐라』에서 자신이 최초로 즉흥 연기를 펼쳤다고 회고 하고 있다. 그는 고양이 연기를 하면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간 흥행에서는 전혀 고양이답지 않게 킁킁거리면 개의 냄새를 맡기도 하고, 무대 앞좌석을 향해 한쪽 다리를 치켜드는 코미디를 도입하기도 했다.

 

채플린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그때 터져 나온 폭소는 흡족한 것이었지만 그 연기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 당시 수상이었던 체임벌린 경은 뮤직홀 공연에서 상스러운 짓을 엄금했던 것이다.

 

1905년 8월 경 어느 날 우리가 불랙번의 마켓 호텔에 있을 때 찰리가 응접실로 들어오더니 노래를 불러 그곳에 있던 농부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마침 장날이어서 호텔 응접실은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찰리는 클록 댄스를 끝으로 쇼를 마쳤다.

 

그는 클록 댄스도 잘 추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쇼를 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쇼를 마친 찰리가 모자를 돌렸던 것이다. 그때 마침 나는 석탄을 나르느라고 그 일을 말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찰리를 좋아했다.

 

프레드 굿윈스는 채플린에 대해서

 

“그는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은행에 돈이 잔뜩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깨달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착실하게 살면서 자신의 급료에서 상당 부분을 저축했다. 그렇다고 결코 인색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검약이 몸에 배었을 뿐이다. ~ 그는 겉치레를 싫어하며, 순전히 허영 때문에 명사와 교제하려는 사람도 아니다.”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의상실로 가는 도중에 그런 스타일의 의상을 입기로 결정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착상은 작은 모자와 큰 구두, 헐렁한 바지와 꼭 끼는 저고리 등 서로 대조를 이루는 옷가지들로 하나의 전체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1914년 경 어느 날 창조된 그 의상과 분장은 영감에 따른 것이었다. 내가 무대에 올랐을 때 그 인물은 완전히 탄생했다. 즉 중산모와 지팡이, 나비넥타이, 짧게 다듬은 콧수염 등의 소품들은 위엄에 대한 소시민 계급의 용감하면서도 무력한 항변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캐릭터의 발을 끄는 걸음걸이의 독특한 동작은 빙크스라는 주정뱅이 노인을 흉내낸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 노인은 브로드가와 복스홀 워크의 모퉁이에 있는 스펜서 채플린 삼촌의 술집 ‘여왕의 머리’ 앞에서 마부의 말을 잡아주는 일을 했다.

 

채플린은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려고 애썼다. “아무도 내가 하는 일이 지금부터 5년 후에는 주급 100달러도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나는 단지 기회가 왔을 때 잡으려는 것뿐이다.”

 

“나는 지금껏 평생 노동자였다. 나는 원하기만 한다면 오늘이라도 영화 일을 그만두고 여생을 편안하고 안락하게 지낼 수도 있다. 나는 아직 젊다. 스물다섯 살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50년 후에도 지금처럼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돈이 전부가 아니다. 인간은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어느 것에서보다도 노동에서 좀 더 큰 행복을 찾을 수 있다.

 

내가 만든 영화들은 모두 곤경에 빠진 내 자신을 정상적인 신사처럼 보이게 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는 아이디어에서 제작된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라도 나는 언제나 지팡이를 잡고 중산모를 고쳐 쓰고 넥타이를 바로잡으려고 기를 쓴다. 거꾸로 땅에 박힌 상황에서라도 말이다.

 

나는 이 아이디어에 확신이 있기에, 나 자신을 낭패스러운 상황 속으로 몰아갈 뿐 아니라 영화의 다른 인물들까지도 곤경 속에 빠뜨린다.

 

여기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중요한 요점이 두 가지 들어 있다. 하나는 보통 사람들은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사람이 곤경에 처하는 광경을 보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인간에게는 자신이 무대나 화면에서 목격한 감정을 스스로 경험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연예 일을 하자마자 먼저 배운 것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은 대체로 부자가 당하는 광경에 만족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이유는 이 세상의 10분의 9가 가난한 사람들이며, 그들은 나머지 10분의 1의 부자들에 대해 내심 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에서 채플린은 생산성이 높은 일꾼이다. 연기는 물론 감독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에 상관없이 세트는 모두 그의 직접적인 감독 아래 설치된다. 그는 조명 효과의 전문가이기도 해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모든 것이 조명 조건에 알맞은지 확인한다. 이 일이 끝나면 단원들을 불러 무대에 올릴 장면을 연습한다. 세상에서 가장 분주한 젊은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된 취미는 바이올린이다. 스튜디오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그는 바이올린에 매달리곤 한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악보를 보고 연주하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오페라 선곡들을 악보도 보지 않고 연주할 수 있으며, 보드빌 연예인답게 기분이 내킬 때면 아일랜드 지그나 흑인 영가 등을 손쉽게 연주하기도 한다.

 

1917년 3월 3일 『극영화 뉴스』지에는 채플린의 독특한 매력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증거가 실렸다. 몇몇 극장 경영자들은 찰리의 코미디를 2주 동안 상영하고 난 뒤에는 극장 의자의 볼트를 조여야 한다고 말했다. 관객들이 너무 웃어대서 그 진동 때문에 볼트가 느슨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채플린은 1918년에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내가 과연 팬터마임에서 성공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어머니는 내가 본 팬터마임 연기자 가운데 최고였다.

 

~ 어머니의 관찰력은 비상했다. 예를 들어서, 어느 날 아침 길을 걸어오는 빌 스미스를 본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저기 빌 스미스가 오는구나. 발을 끌고 있고 구두에는 광택을 냈어. 화난 표정이고 말이야. 난 저 사람이 자기 아내와 대판 싸우고 아침도 그른 채 나왔다는 데 걸겠어. 정말일걸! 그 사람이 건포도 롤빵과 커피를 사 먹으러 빵집에 들어가는구나!”

 

그러면 그날 중에 나는 영락없이 누군가에게서 빌 스미스가 자기 아내와 대판 싸웠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멘조우는 채플린에 대하여

 

할리우드에서 ‘천재’라는 말은 남용되고 있지만, 채플린의 경우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진정’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할리우드에서 천재가 나온 적이 있다면 가장 먼저 꼽아야 할 사람은 분명 채플린일 것이다.

 

채플린은 록펠러 재단 대표와 함께 연단에 올라 아동들에게 “언제나 자신 있게 웃을 수 있도록 날마다 이를 닦으세요. 그리고 웃을 수 있는 한 여러분은 행복하다는 사실, 행복은 건강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채플린은 열의에 대하여 “만일 내게 어떤 착상이 생겼는데 누군가 내 열의를 꺾으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열의란 그런 것이다. 열의는 나를 열중하게 만들고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세상 그 자체가 하나의 연극이었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연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1921년 경 앨프 리브스는 캔자스시티 역에서 찰리를 배웅했다. 찰리는 열차에 올라타면서 앨프에게 조그만 끄러미를 내밀며 “메리 크리스마스, 앨프”하고 말했다.

 

찰리를 태운 열차가 출발하고 난 후 꾸러미를 열어 본 앨프는 두툼한 문고판 한 권과 그 속에 들어 있는 100달러짜리 지폐, 그리고 다음과 같이 쓴 쪽지를 발견했다.

 

‘우리의 우정에 대한 조그만 성의 표시입니다. 앨프에게 찰리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안 들지 모를 선물을 사느라 돈을 허비하는 대신 찰리는 앨프가 직접 선물을 고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앨프는 지폐가 든 그 문고판을 오랬동안 고스란히 간직했다.

 

 

“오, 그런가요? 바로 그것이 역사의 위대성이지요. 한 사람을 죽이면 악당이 되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 되니까요. 숫자가 죄를 씻어주는 거요. 친구.”

 

 

1959년 행복의 비결에 대하여 “나는 아내를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 우리가 행복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서로 상대방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결혼 생활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이다. 그 나머지 문제는 인내심으로 대해야 한다. 16년 동안의 결혼 생활에서 우리가 떨어져 있었던 것은, 우나가 사업차 미국에 다녀온 5일뿐이었다.”

 

여덟 아이들의 아버지 채플린

 

우나가 장녀인 제랄딘을 낳았을 때 채플린은 쉰다섯 살이었으며, 막내 크리스토퍼가 태어났을 때는 일흔세 살이었다. 대부분의 남자가 할아버지의 역할을 맡으며 한가한 여생을 보내야 할 나이에 젊은 가정을 유지했다는 것은 놀랍고도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일흔 다섯 번째 생일을 맞았다. 이번에 그가 세상을 향해 던진 메시지에는 슬픔과 낙관이 섞여 있었다. “그 모든 즐거움과 유쾌함, 웃음소리는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오늘날에는 모두들 지나칠 정도로 심각하다.”

 

찰리 채플린은 1977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한밤중에 수면 중에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