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책(冊)

무소유 / 법정 / 범우사

물조아 2012. 3. 23. 06:11

 

나의 취미는 / 오늘 나의 취미는 끝없는, 끝없는 인내다.

 

비독서지절 / 이 쾌청의 날씨에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벽을 바라보고 좌선을 할 것인가, 먼지 묻은 퀴퀴한 경전을 펼칠 것인가, 그런 짓은 아무래도 궁상스럽다. 그리고 그것은 이토록 맑고 푸르른 가을 날씨에 대한 결례가 될 것이다.

 

이 좋은 날에 그게 그것인 정보와 지식에서 좀 해방될 수는 없단 말인가, 이런 계절에는 외부의 소리보다 자기 안에서 들리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제격일 것 같다.

 

가을은 / 뜻이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짐승처럼 주리를 트는 그런 길이라고는 차마 상상할 순 없다. 우리는 미워하고 싸우기 위해 마주친 원수가 아니라, 서로 의지해 사랑하려고 아득한 옛적부터 찾아서 만난 이웃들이다.

 

무소유 /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아갈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

 

너무 일찍 나왔군 /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조금 늦을 때마다 ‘너무 일찍 나왔군’하고 스스로 달래는 것이다.

 

똑같은 조건 아래서라도 희노애락의 감도가 저마다 다른 걸보면, 우리들이 겪는 어떤 종류의 고와 낙은 객관적인 대상에 보다도 주관적인 인식여하에 달린 것 같다. 아름다운 장미꽃에 하필이면 가시가 돋쳤을까 생각하면 속이 상한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없는 가시에서 저토록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어났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하고 싶어진다.

 

설해목 /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종점에서 조명을 / 인간의 일상생활은 하나의 반복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대개 비슷비슷한 일을 되풀이하면서 살고 있다. 시들한 잡담과 약간의 호기심과 애매한 태도로써 행동한다. 여기에는 자기 성철 같은 것은 거의 없고 다만 주어진 여건 속에서 부침하면서 살아가는 범속한 일상인이 있을 뿐이다.

 

일상의 지겨운 사람들은 때로는 종점에서 자신의 생을 조명해 보는 일도 필요하다. 그것은 오로지 반복의 깊어짐을 위해서

 

탁상 시계 이야기 / 지난해 가을, 새벽 예불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큰 법당 예불을 마치고 판전을 거쳐 내려오면 한 시간 가까이 걸린다. 돌아와 보니 방문이 열려 있었다. 도둑이 다녀간 것이다. 평소에 잠그지 않는 버릇이라 그는 무사통과였다.

 

살펴보니 평소에 필요한 것들만 골라 갔다. 내게 소용된 것이 그에게도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가져간 것보다 남긴 것이 더 많았다. 내게 잃어버릴 물건이 있었다는 것이, 남들이 보고 탐낼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적잖이 부끄러웠다.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회심기 / 정말 우리 마음이란 미묘하기 짝이 없다.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여유조차 없다.

 

나그네 길에서 / 지난해 가을, 나는 한 달 가까이 그러한 나그네 길을 떠돌았다. 승가의 행각은 세상 사람들의 여행과 다른 데가 있다. 볼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어디서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발길 닿은 대로 가는 것이다.

 

지리산에 있는 쌍계사 탑전! 그 시절 내가 맡은 소임은 부엌에서 밥을 짓고 찬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진 시간이 되면 착실하게 좌선을 했다. 양식이 떨어지면 탁발(동냥)을 해오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40리 밖에 있는 구례장을 보아왔다.

 

선사와 나는 그 시절 아침에는 죽을, 점심때는 밥을 먹고, 오후에는 전혀 먹지 않고 지냈었다. 내 불찰로 인해 노사를 굶게 한 가책을 그때뿐 아니라 두고두고 나를 일깨웠다.

 

그 여름에 읽은 책 / 더없이 심오한 이 법문 / 백천만 겁에 만나기 어려운데 / 내가 이제 보고 듣고 외니 / 여래의 참뜻을 바로 알아지이다.

 

이렇게 해서 그해 여름 〈심회향품〉을 10여 회 독송했는데 읽을수록 새롭고 절절했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라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 우러나서 한 일이라 환희로 충만할 수 있었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목소리를 통해 나 자신의 근원적인 음성을 듣는 일이 아닐까.

 

잊을 수 없는 사람 / 산에서 앓으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수행자는 성할 때도 늘 혼자지만 앓게 되면 그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까이에 의료기관도 없다. 그저 앓을 만큼 앓다가 낫기를 바랄 뿐이다.

 

운수들 사이는 무소식이 희소식으로 통했다. 세상에서 보면 어떻게 그리 무심할 수 있느냐 하겠지만, 서로가 공부하는 데 방해를 끼치지 않도록 배려해서다.

 

사람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지식이나 말에 의해서가 아님을 그는 깨우쳐 주었다. 맑은 시선과 조용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과 그리고 말이 없는 행동에 의해서 혼과 혼이 마주치는 것임을 그는 몸소 보여 주었다.

 

미리 쓰는 유서 / 누구를 부를까? 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 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 생명 자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저마다 혼자일 수밖에 없다.

 

녹은 그 쇠를 먹는다 / 남을 미워하면 저쪽이 미워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미워진다. 아니꼬운 생각이나 미운 생각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그 피해자는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간다면 내 인생 자체가 얼룩지고 만다.

 

미워하는 것도 내 마음이고, 고와하는 것도 내 마음에 달린 것이다.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뜻이다. ~ 왜 우리가 서로 증오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같은 방향으로 항해하는 나그네들 아닌가.

 

침묵의 의미 /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된다. 똑같은 개념을 지닌 말을 가지고도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은 서로가 말 뒤에 숨은 뜻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 성급한 현대인들은 자기 언어를 쓸 줄 모른다. 정치 권력자들이, 탤런트들이, 가수가, 코미디언이 토해낸 말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주워서 흉내 내고 있다. 그래서 골이 비어간다. 자기 사유마저 빼앗기고 있다.

 

침묵의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기 위해서이지, 비겁한 침묵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디에도 거리낄 게 없는 사람만이 당당한 말을 할 수 있다.

 

순수한 모순 / 생 텍쥐페리의 표현을 빌린다면 내가 내 장미꽃을 위해 보낸 시간 때문에 내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하게 된 것이다. 그건 내가 물을 주어 기른 꽃이니까, 내가 벌레를 잡아 준 것이 그 장미꽃이니까.

 

영혼의 모음 - 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 / 지금까지 읽은 책도 적지 않지만, 너에게처럼 커다란 감돌을 받은 책은 많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네가 나한테는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의 경정이라고 한 대도 조금도 과장이 아닐 것 같다.

 

누가 나더러 지묵으로 된 한두 권의 책을 선택하라면 〈화엄경〉과 함께 선뜻 너를 고르겠다.

 

본래무일물 / 자기가 아끼던 물건을 도둑맞았거나 잃어 버렸을 때 그는 괴로워한다. 소유 관념이란 게 얼마나 지독한 집착인가를 비로소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은 물건을 잃으면 마음까지 잃는 이중의 손해를 치르게 된다.

 

살아남은 자 / 거름을 묻으려고 흙을 파다가 문득 살아남은 자임을 의식한다. 나는 아직 묻히지 않고 살아 남았구나 생각이 들었다. ~ 망우리 묘지 앞을 지나오면서 문득 나는 아직도 살아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름다움 - 낯모르는 누이들에게 / 그들은 모르고 있어, 감추는 데서 오히려 나타난다는 예술의 비법을. 현대인들은 그저 나타내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감추는 일을 망각하고 있어. 겉치레에만 정신을 파느라고 속을 다스릴 줄 모른단 말야.

 

진리는 하나인데 - 기독교와 불교 / 이교도라면 무조건 적대시하려 드는 배타적인 감정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유일한 것이고 그밖에 다른 종교는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미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맹목에서일 것이다.

 

내가 즐겨 읽는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만약 예수님과 부처님이 자리를 같이한다면 어떻게 될까?

 

마하트마 간디의 표현을 빌리면, 종교란 가지가 무성한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가지로 보면 그 수가 많지만 줄기로 보면 하나뿐이다. 똑같은 히말라야를 가지고 동쪽에서 보면 이렇고, 서쪽에서 보면 저렇고 할 따름이다.

 

종교는 인간이 보다 지혜롭고 자비스럽게 살기 위해 사람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길’이다.

 

불교의 평화관 / 우리는 물고 뜯고 싸우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서로 의지해 사랑하기 위해 만난 것이다. 끝. 2012.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