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무라카미 하루키/양윤옥 옮김/(주)문학동네 세계문학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것 하지만 네가 나를 믿어준다면 모두 다 진짜가 될 거야.
예루살렘상 수상 기념 연설문: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소설가로서, 즉 거짓말을 꾸며내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중략~
소설가의 거짓말은 다른 사람들의 거짓말과는 다릅니다. 그는 거짓을 말한다고 해서 비도덕적이라고 비난당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거짓이 크면 클수록, 거짓말이 능숙하면 할수록, 독자들이나 비평가로부터 큰 찬사를 받습니다. 왜일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거짓말을 잘하는 것, 즉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 소설가는 진실을 들추어내고, 그곳에 새로운 빛을 비출 수 있게 됩니다.
대개의 경우, 진실의 본디 모습을 파악하여 그것을 그 모습 그대로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이 숨어 있는 장소로부터 그것을 꾀어내어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옮김 다음,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치환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일을 해내려면 진실이 우리 사이의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는 좋은 거짓말을 꾸며내는 데 필수적인 자질이기도 합니다. 중략~ 우리소설가들은 제 눈으로 본 것과 제 손으로 만져본 것 외에는 쉽게 믿지 않습니다.
아오마메(靑豆)는 그녀의 본명이다. 아오마메는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는 본가와 절연했다. 어머니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오마메는 조부모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하고 나면 일상 풍경이, 뭐랄까,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하지만 겉모습에 속지 않도록 하세요. 현실은 언제나 단 하나뿐입니다.”
덴고(天吾)의 아버지는 NHK 수금원, 어머니는 덴고가 태어나고 얼마 뒤에 병을 얻어 죽었다. 아버지는 그 뒤 재혼하지 않고 혼자 덴고를 키웠다. 덴고는 몸집이 크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농부 같은 눈을 하고 있다.
지금은 1984년 4월. 내(아오마메)가 태어난 건, 그래, 1954년이다.
“아오마메는 숨을 들이쉬고 호흡을 멈춘 후 정신을 집중하여 그 부위를 재빨리 짚었다. 그리고 표시를 하듯이 손톱 끝으로 그곳을 가볍게 눌렀다. 눈을 감고 그 감촉이 틀림없는지 확인했다.”
길이는 10센티미터 남짓, 자루부분은 작고 단단한 나무재질이다. 끝부분은 마치 바늘처럼 날카롭고 뾰족하다. 바늘 끝은 살을 뚫고 뇌의 하부에 있는 특정한 부위를 찌르고 촛불을 후욱 불어 끄듯이 심장의 고동을 멈추게 한다.
모둔 것이 한 순간에 끝난다. 남자는 헉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생의 마지막 순간, 거기에 두려움은 없다. 고통도 없다. 이토록 편한 죽음은 없을 것이다.
이 자를 신속하게 아무도 모르게, 하지만 확실하게 저쪽 세계로 보내버리는 게 내게 주어진 사명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사명을 완수했다. 이 남자는 조금 전까지 분명 살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죽어 있다. 본인도 미처 깨닫지 못한 채로 삶과 죽음을 가르는 문턱을 넘어서버렸다.
“나비와 친구가 될 수 있나요?” “나비와 친구가 되려면 우선 당신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야 해요. 인간으로서의 기척을 지우고 여기서 가만히 자신을 나무나 풀이나 꽃이라고 믿는 거예요. 시간은 걸리지만 일단 상대가 마음을 허락하면 그다음은 저절로 사이좋은 친구가 될 수 있어요.”
“이런 짓을 하는 인간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게다가 그런 쓰레기 같은 위험한 자가 세상에 활개를 치고 다니면서 어디선가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아낼 일도 없고” “하늘의 뜻”
1Q84년. 이 새로운 세계를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아오마메는 그렇게 정했다. Q는 question mark의 Q다. 의문을 안고 있는 것.
좋든 싫든 나는 지금 이 ‘1Q84년’에 몸을 두고 있다. 내가 알고 있던 1984년은 이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1Q84년이다. 공기가 바뀌고 풍경이 변했다.
나는 이 물음표 딸린 세계의 존재양식에 되도록 빨리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숲에 내던져진 동물과 똑같다. 내 몸을 지키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 장소의 룰을 한시라도 빨리 이해하고 거기에 맞춰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수많은 자격심사가 있고 관청의 번잡스러운 수속을 하나하나 통과해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뒤에서 정치적인 힘을 써주면 그런 관문을 통과하는 건 대폭 간편해지지, 중략~ 그리고 해석의 여지가 있는 곳에는 항상 정치력이나 이권이 개입할 여지가 생기게 마련이고,~”
“문학인류학의 목적 중 한 가지는 사람들이 품은 개별적인 이미지를 상대화하고, 거기서 인간에게 있어 보편적인 공통점을 찾아내어 다시 그것을 개인에 피드백 하는 것이야.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립적이면서도 어딘가에 속한다는 포지션을 획득할 수 있거든. 내 말을 알겠나?”
“그런 건 젊은 시절에 열심히 즐겨둬야 해요. 마음 가는 데까지. 나이 들어 그런 일을 할 수 없게 된 다음에는 예전 기억으로 몸을 따스하게 덥혀야 하니까요.”
사람이 자유로워진다는 건 어떤 것일까, 그녀는 곧잘 자문했다. 하나의 감옥에서 멋지게 빠져나온다 해도, 그곳 역시 또 다른 좀더 큰 감옥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어떤 경우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대단히 소중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야. 그저 그것을 헤아려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뜻을 갖게 된단다.”
“선생님의 전망으로는 앞으로 이일이 어떻게 되어갈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어.” “앞일은 누구에게나 미지의 영역일세. 지도는 없어. 다음 모퉁이를 돌았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그 모퉁이를 돌아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어. 짐작도 못하지.”
“자네도 잘 알겠지만, 조지 오웰은 소설 『1984년』에서 빅 브라더라는 독재자를 등장시켰어. 물론 스탈린주의를 우화적으로 그린 것이지. 그리고 빅 브라더라는 용어는 그 이후 일종의 사회적 아이콘이 되었네. 그건 오웰의 공적이겠지. 그리고 바로 지금, 실제 1984년에 빅 브라더는 너무도 유명하고 너무도 빤히 보이는 존재가 되고 말았어.”
“리틀 피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야. 그것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조차 우리는 알지 못하지, 하지만 그건 분명하게 우리의 발밑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어” “리틀 피플에게 해를 입지 않으려면 리틀 피플이 갖지 않은 것을 찾아내야 해요. 그렇게 하면 숲을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어요.”
“형체가 있는 것 중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답니다. 그리고 나는 돈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요. 특히 이번 일에 관해서는 시간은 좀 걸릴지도 모르겠으나, 필요한 정보는 반드시 입수하지요.”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아오마메는 생각했다. 이를테면 달~
아오마메는 알지 못한다. 그녀가 아는 것은 자신은 이제 또 다른 인생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 정도다. 무엇이 어찌 되었든 나는 이 인생을 살아나가는 수밖에 없다. 반품하고 새 것으로 바꿔달라고 할 수는 없다. 체호프는 말했다. “소설가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일뿐이다.”
시간이 일그러진 모양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 시간 그 자체는 균일한 성분을 가졌지만 그것은 일단 소비되면 일그러진 것으로 변해버린다. 어떤 시간은 지독히 무겁고 길며 어떤 시간은 가볍고 짧다.
그리고 때때로 전후가 바뀌거나 심할 때는 완전히 소멸되기도 한다. 있을 리 없는 것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인간은 아마도 시간을 그처럼 제멋대로 조정하면서 자신의 존재의의 또한 조정하는 것이리라.
“세계라는 건 말이지, 아오마메씨 하나의 기억과 그 반대편 기억의 끝없는 싸움이야.” “하나의 기억과 그 반대편 기억의 끝없는 싸움?” “아오마메씨는 뭔가 두려운 게 없어?” “물론 있지” “나는 내가 가장 두려워.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는 게. 나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는 게”
“뭔가 중요한 것을 창조하자면, 혹은 뭔가 중요한 것을 발견하자면 시간도 걸리는 것이고 돈도 들게 마련이지요. 중략~ 시간은 자꾸자꾸 흘러갑니다. 기회는 사라져갑니다. 그리고 돈이 있으면 그걸로 시간을 살 수 있어요. 사려고 마음먹으면 자유까지도 살 수 있습니다. 시간과 자유, 그건 인간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지요.”
“일정 나이를 넘으면 인생이란 무언가를 잃어가는 과정의 연속에 지니지 않아요. 당신의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이 빗살 빠지듯이 하나하나 당신 속에서 새어나갑니다. 그리고 그 대신 손에 들어오는 건 하잘것없는 모조품뿐이지요. 육체적인 능력, 희망이며 꿈이며 이상, 확신이며 의미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 그런 것이 하나 또 하나, 한 사람 또 한사람, 당신에게서 떠나갑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선도 없고 절대적인 악도 없어” “선악이란 정지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장소와 입장을 바꿔가는 것이지. 하나의 선이 다음 순간에 악으로 전환할지도 모르는 거야.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 중략~ 중요한 것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선과 악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지”
주의 깊고 참을성 강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위기는 방심한 단 한 순간에 찾아온다. 스스로 시도해볼 수 있는 만큼은 시도해보고 싶다. 만일 안 된다면 거기서 포기하면 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할 만큼은 해본다.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이다.
아오마메를 찾자. 덴고는 새삼 마음먹었다. 무슨 일이 있건, 그곳이 어떤 세계이건, 그리고 그녀가 누구이건~~~ 끝.
사진출처: 한국일보 이스라엘 최고문학상 ‘예루살렘상’ 시상식 참석 '10.12.19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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