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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그들은 어째서 여전히 가난한가

물조아 2009. 10. 13. 14:57

청교도적 신념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운 미국인들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부지런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는 윤리적 노동관을 오랫동안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퓰리처상 수상자이자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 작가인 데이비드 K. 쉬플러는 '워킹 푸어, 빈곤의 경계에서 말하다'(후마니타스 펴냄)에서 이런 신념이 현실에서 통하지 않은 사례가 상당히 많이 있다고 말한다.


2년 과정의 대학을 졸업한 캐롤라인은 1970년대 중반 공장에서 시급 6달러에 담배 라이터 만드는 일을 했는데, 2000년이 되어서도 대형 마트에서 시급 6.80달러의 단순 노동을 하고 있다.


30년간 꽤 발전한 미국 경제의 혜택을 캐롤라인이 누리지 못한 명확한 이유를 찾기는 어렵다. 백인이므로 인종차별을 받았던 것도 아니고 직장 상사들도 그가 대단히 근면하다고 인정했다.


단지, 관리직에 지원할 때마다 남자 직원이나 더 젊고 날씬한 여성들에게 먼저 그 일이 돌아갔을 뿐이다. 캐롤라인은 지난 10년간 가난 때문에 치과에 가지 못했고, 그 때문에 치아를 모두 뽑아내야 했다.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아마도 인상이 좋지 않다는 점이 승진 탈락의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일자리를 가지고도 늘 불안하고 가난한 상태인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의 사례는 이 책에 수십 건 등장한다. 세차장에서 일하는 남자는 자신의 승용차가 없고, 은행에서 수표 정리를 맡은 여성의 통장 잔고는 2달러 2센트다.


근로빈곤층이 생겨나는 이유는 복잡하고 명확하지 않다. 저자는 이를 허름한 아파트의 악순환으로 설명한다.


허름한 아파트는 아이의 천식을 악화하고, 천식 악화로 구급차를 부르는 빈도가 늘어나며, 지불할 수 없는 의료비가 늘어난다. 그러면 아이 어머니의 신용 기록이 나빠지고, 그에 따라 자동차 할부금 이자가 높게 책정된다. 그렇게 되면 이 여성은 제시간에 출근하기가 어려워지고, 지각을 자주 하니 승진에서 제약을 받아 허름한 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빈곤을 개인과 사회 어느 한 쪽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데, 그런 균형 잡힌 시각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일단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기엔 사회구조의 책임이 막중하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일하는데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다.


게다가 빈곤은 대물림된다. 영양실조는 아이의 뇌 발달을 저해하고 스트레스도 아이의 발목을 잡는다. 어렸을 때의 학대 경험으로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게 자라지 못하고 여건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아 자녀에게 비슷한 환경을 물려준다.


제3세계나 개발도상국에서 불법으로 미국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에서 인간다운 권리를 찾기는커녕 불법체류자 신분을 악용당하면서 돼지우리 같은 가건물에서 한데 뒤엉켜 생활하거나 임금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구조 탓으로 돌리기에는 빈곤이 개인에게 달린 일인 것도 일부 사실이다. 빈곤층들은 하드 스킬(직업적 기술)뿐 아니라 소프트 스킬(인간관계와 사교력) 모두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소득이 부족할수록 투표율을 비롯한 정치 참여도가 낮아지는데, 이것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하나의 원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빈곤을 극복하고 자식들을 성공시킨다. 성공 사례를 남긴 직업센터 졸업생들도 있고 성폭행당하고 힘들게 살아왔으나 드디어 늪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한 여성도 있다.


22년간 뉴욕타임스 기자로 활동했고 '아랍과 유대:약속의 땅에서 상처받은 영혼들'로 1987년 퓰리처상을 받았던 저자는 기자 출신답게 근로빈곤층에 관한 '심층 리포트'를 펼쳐놓는다.


가난한 노동자들 수십 명을 만나고 5∼6년간 지속적으로 관찰한 결과로 얻어낸 풍부한 사례들은 이 책의 큰 성과다.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읽다 보면 근로빈곤층의 존재와 말 한두 마디나 간단한 이론으로 쉽게 규명할 수 없는 복잡한 원인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명쾌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저자는 그만큼 근로빈곤을 치료할 '만병통치약'은 없으며 직업, 임금, 건강보험, 주거 환경, 교통, 육아, 학교교육 등 모든 요인을 다루는 개선책들이 한꺼번에 나오는 것만이 방법이라고 말한다.


손대기에는 너무 복잡하므로 나 몰라라 할 것이 아니라 근로빈곤의 심각한 현실과 복잡한 원인을 종합적으로 인식하고, 정부와 기업체, 개인이 이를 해결할 능력과 의지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총체적으로 해결할 능력과 의지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적은 비용으로 적당히 해치워 버리려 한다면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돈만 낭비하는 꼴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정부와 기업을 통한 사회의 의무와 노동과 가족을 통한 개인적 의무를 하나로 통합해 대처하는 "두 마리 토끼 쫓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나일등 옮김. 548쪽. 1만9천원. (서울=연합뉴스) 사진출처: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