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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통치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

물조아 2009. 4. 7. 19:52

이화학술원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적 성찰 / “일제의 한반도 식민통치는 스스로 발전할 능력이 없던 조선을 개발, 근대화시켰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탈도 좀 했지만 그보다는 조선을 개발하고 근대화한 측면이 훨씬 크다.”


옛 조선총독부가 선전매체를 통해 조선인들에게 홍보한 선전 내용이 아니다. 최근까지도 국내외 학자들이 구체적 통계수치를 제시하며 공공연히 주장하는, 엄연한 ‘학설’이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근대화의 잣대를 경제적 측면에 맞춰 식민지 시기의 다양한 경제지표를 논거로 경제성장론을 주장하고 있다.


식민지 시기를 보다 객관적·과학적으로 분석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철저하게 양적 성장과 자본주의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관점은 근대 산업정책이나 제도가 갖는 정치사회적 연계성 및 내적 구조분석을 도외시, 결과적으로 식민지 사회의 실체 파악에는 실패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화여대 이화학술원이 최근 발간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나남·사진)에서 필자들은 식민지 시기 공업·농업·광업·교육·통신 부문을 실증적으로 분석하면서 당시의 역사적 실상을 보여준다. 아울러 식민지 통치 및 정책수행에서 드러난 근대화론의 문제점을 낱낱이 짚고 있다. 각 산업부문에서 필자들이 시도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소개한다. 

 

◆ 공업부문 = 신용하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수록문 ‘일제의 식민지 공업정책과 한국사회경제, 1930∼1945’에서 일제 식민지 정책이 ‘산업화’를 추진했다는 주장의 허구를 증명하기 위해 1930·40년대 조선에서 실시된 공업정책의 중심축인 군수공업의 구조와 성격을 엄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신 교수에 따르면, 이 시기 일제의 조선에 대한 공업정책은 ‘대륙침략 병참기지화’란 큰 틀에서 군수공업에 집중됐다. 따라서 주민의 시장경제와 직결된 공업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군수공업 중심의 공업화는 정상적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의 경제원리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일제의 계획과 명령을 집행하는 ‘통제경제’, ‘명령경제’ 방법을 택한 결과였음을 보여준다. 신 교수는 “경제성장의 외적 현상만으로 식민지 사회를 해석, 일제의 군수공업 설치를 자유시장경제의 공업화로 다루는 것은 결코 올바른 역사 읽기가 아니다”고 비판했다.


◆ 농업부문 = 하지연 이화사학연구소 연구원은 ‘일제하 한국농업의 식민성과 근대성’이란 제목의 수록문에서 일본인 대지주 및 회사지주에 의한 한국농업 침탈 및 식민지 소작제 농업경영에 대한 사례분석을 통해 일제가 어떻게 한국의 농업을 재편했는가를 규명하고 있다. 일본인 지주들은 한국의 농업생산 현장에서 일제 식민지 농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감행한 사회·경제적 권력체였다.


하 연구원은 1904년부터 한국에서 불법적으로 토지를 매입, 소작제 농장경영에 착수했던 가와사키 토타로(川崎藤太郞)의 전북 옥구군 서수면 농장 운영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통해 ‘식민지 소작제’의 실상을 보여준다. 가와사키 농장이 일본시장으로의 쌀 수출을 위해 어떻게 일본 쌀종자를 강제 보급했으며, 증산을 위한 비료사용의 의무화에 어떤 강제력을 행사했는가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한마디로, 농업분야의 개발 주체와 창출된 이윤의 수혜 대상은 결코 한국인이 아니라 일제 식민권력과 그를 등에 업은 일본인 지주, 식민 종주국의 일본인이었던 것이다.


◆ 광업부문 = 일제는 태평양전쟁 당시 전쟁지원을 위해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를 강제로 동원, 일본의 탄광 및 각종 군수산업에 배치했다. 김은정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연구원은 수록문 ‘태평양 전쟁기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과 탄광배치’에서 일제가 공권력을 이용, 노동자 강제동원을 실행하는 과정을 구체적 사례를 통해 밝히고 있다.


김 연구원은 “일본의 탄광업 연합체인 석탄통제회와 재일 조선인에 대한 통제조직인 중앙협화회는 조선인 노동자를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는 일본 탄광에 공급했다”며 “또한 강제동원된 조선인의 반일감정을 억누르고 노동생산성의 제고를 위해 황민화 교육 및 정신무장을 강화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일제의 침략전쟁 지원을 위한 석탄 채굴에 강제연행돼 무임금 또는 저임금의 민족적 차별과 억압 속에 재해율이 높은 갱내 작업에 내몰렸던 조선인들이 과연 근대적 노동자였는가를 묻고 있다.


◆ 통신부문 = 통신망의 확충과 각종 통신시설의 확충은 한국인의 안전이나 생활 향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 확립과 제국주의적 팽창에 근본 목적이 있었다. 나애자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수록문 ‘근대적 통신기술과 식민지 한국인의 삶’에서 이 같은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제 시기 우편과 전보, 전화를 이용한 상거래와 원격지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그 가운데 한국인의 ‘통신력’도 점차 향상돼간 것은 사실이다. 1920년대에 들어와 ‘문명의 신경’인 통신의 발달이 철도 부설이나 도로 정비 못지 않게 지역 발전을 가져오는 것으로 널리 인식돼 여러 지역에서 근대적 통신수단의 이용에 대한 욕구가 팽창했다. 그러나 한국인의 통신수요는 일본인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대만보다도 통신기관이 보급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실한 통신기관의 운영 때문에 우편·전보의 배달 등 서비스가 불량해 주민들의 비판여론이 비등한 지역이 속출할 정도였다. 나 연구관은 “일제 강점기 통신을 과연 상공업과 도시의 발달을 촉진하고 일상생활의 편리를 가져왔다는 ‘통신 근대화’의 근거로 해석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밝혔다. 문화일보 김영번기자 사진 ◇ 고종과 신하들이 고종의 침소인 덕수궁 준명당에서 찍은 사진. ⓒ인터넷 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