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쉴 수 있어 (感謝)

“한국은 가족에게 ‘육아·교육·부양’ 다 떠넘겨”

물조아 2009. 4. 8. 21:48

‘가족·생애·정치경제…’ 펴낸 장경섭 교수. ‘가족피로’ 임계점 도달…이혼·저출산 등 초래. 국가가 해야 할 사회투자기능 제대로 수행을


어머니 열풍이다. 소설과 드라마, 연극을 가릴 것 없다. 10여년 전 ‘아버지 신드롬’에 견줄 만하다. 시절이 수상한 탓이다. 위기가 엄습할 때마다 본능처럼 살붙이에게 기대는 것. 한국의 가족주의는 그만큼 뿌리 깊고 유구하다.


“전지전능한 모성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모순투성이 사회질서를 지탱하고 급격한 사회변화를 견디게 만든 게 한국의 가족인데, 그 중심에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사회·경제적 위기로 삶이 뿌리째 흔들리니, 잊고 있던 모성의 존재를 재확인하면서, 거기에 기대고 또 위안받고 싶은 것이죠.”


장경섭 서울대 교수(사회학·사진)는 최근의 ‘엄마 신드롬’을 사회적 위기 국면마다 작동하는 가족 의존 메커니즘을 통해 설명했다. 삶이 버거울 때마다 가족을 호명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인들이 가족주의에 기초해 일궈온 압축적 근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얘기다. 그는 이런 문제의식을 최근 출간한 <가족·생애·정치경제-압축적 근대성의 미시적 기초>(창비)라는 책에 담아냈다.


“한국의 근대화는 24시간 기계 돌리듯, 가족을 풀가동하는 ‘가족 동원 체제’에 의존해 이뤄졌습니다. 인적자원 양성에 필수적인 교육과 부양의 역할을 가족에게 맡겨둔 채 국가는 모든 자원을 성장과 고용 창출에 집중시켰던 것이죠. 말하자면 국가나 사회가 떠맡아야 할 짐을 가족들이 대신 짊어졌던 셈입니다.”


한국의 가족이 떠맡았던 이런 기능을 장 교수는 ‘사회투자 가족’이란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재분배보다 교육·훈련 등 인적자본 투자에 주력하는 새로운 복지국가를 지칭하기 위해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사용한 ‘사회투자 국가’란 개념을 한국적 현실에 맞게 변형한 것이다.


“개인들 역시 본인뿐 아니라 자녀나 형제의 교육적 성취를 위해 가족이 가진 자원을 최대한 동원했습니다. 구성원의 사회적 성공이 전체 가족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킬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국가가 수행해야 할 사회투자를 대신하게 된 것이죠.”


문제는 과중한 짐이 지워지다 보니 가족의 기능에 ‘과부하’가 걸리게 됐다는 점이다. 장 교수는 그 징후가 근대화에 따른 서구 가족이념의 유입과 함께 나타난 뒤 지속적으로 상태가 악화돼 왔다고 본다.


“한국 사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변화의 압축성과 복합성인데, 그 결과 상이한 시공간에서 형성된 다양한 가족이념이 한국인의 가족관계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노인과 아동에 대한 부양·보호 기능을 부과하는 유교적 가족이념에 가족 성원의 성공을 위해 자원을 쏟아부을 것을 장려하는 도구주의 가족이념과 서구에서 유래한 개인주의·서정주의 가족이념이 더해졌습니다. 여기에 국가의 가족 의존적 사회정책이 맞물리면서 한국인들의 ‘가족 피로’를 가중시키게 된 것이죠.”


1990년대 말 경제위기에 이은 급진적 구조조정은 한국인의 ‘가족 피로’를 임계점까지 밀어붙였다. 결국 상황은 이혼과 만혼, 독신, 무자녀, 저출산 등과 같은 전방위적인 가족 해체와 탈가족화로 폭발했다는 게 장 교수의 진단이다.


“신보수주의자들은 가족의 가치와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틀렸어요. 문제의 핵심은 과거와 같은 ‘가족 의존적 정치경제’가 더는 지탱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에게 계속 부담을 지우려고 하면 가족뿐 아니라 거시적인 사회체제가 위기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가족의 해체가 사회 해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장 교수는 이런 위기의 징후로 공교육 붕괴와 급증하는 자살률을 꼽았다.


“대안이요? 육아와 교육, 노인 부양 등 가족이 수행하던 기능을 사회화해야지요. 국가가 적극적으로 부담해야 합니다. 그렇게 가족 피로를 덜어줘야 젊은 사람들이 결혼도 안 미루고 자녀도 많이 낳습니다. 미풍양속을 내세워 과중한 부담을 강요하면 그나마 남아 있는 미풍양속마저 사라지는 법입니다.”


장 교수는 최근의 탈가족주의화가 개인주의 사회의 도래를 가져올 것이란 ‘상식적’ 기대에 대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개인주의는 오랜 사회·경제·문화적 과정을 거치며 형성되는 문명적 구성물인 만큼, 복잡한 적응과 준비 기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결국 심각한 문화적 갈등과 혼란 상태가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게 장 교수의 전망이다.


가족중심주의는 해체되고 있는데 이를 대체할 개인주의는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 한국사회의 딜레마는 이거예요. 가족에 닻을 내리고 살던 사람들이 의지할 게 없어지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노숙자가 되고 자살을 합니다. 정부의 발상 전환이 아쉽습니다.” 한겨레 글 이세영 기자 사진 신소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