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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산의 위기 탈출, 배에 불 나면 바다로 뛰어들어라!

물조아 2009. 1. 31. 18:13

복합기능팀 혁신 주도, 정확한 진단과 빠른 결정으로 ‘닛산 리바이벌’ 성공!


위기의식이 전 세계 목을 조르는 듯하다. 이럴 때 주저앉으면 끝장이다. 역의 발상-. 언필칭 위기를 기회로 삼자고 하지만 실행은 쉽지 않다. 일본 닛산에 그 길을 묻는다.


'불길에 휩싸인 배의 갑판에 서 있는 기분이다.” 1993년 3월 르노를 떠나 닛산의 최고운영책임자(COO)로 부임한 카를로스 곤(Carlos Ghosn)은 당시의 중압감을 이렇게 피력했다.


닛산의 일본 내 시장 점유율은 1974년의 34%를 정점으로 계속 떨어지다가 19%까지 주저앉은 상태였다. 더 심각한 것은 ‘글로벌 닛산’의 임직원이 모두 국내시장 점유율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는 사이 닛산은 해외에서도 점차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1991년 6.6%였던 닛산의 해외시장 점유율은 4.9%까지 내려가 있었지만 경영진은 그것을 거들떠볼 겨를조차 없었다. 재무상태도 최악이었다.


당시 닛산은 2조1000억 엔의 부채와 연간 1000억 엔의 이자를 내느라 허덕이고 있었다. 10년째 이익이 나지 않아 재무구조는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배의 선장이 된 곤에겐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빨리 탈출하지 않으면 배 전체가 가라앉고 말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라도 일단 뛰어들어 한 방향으로 헤엄치지 않으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게 곤의 판단이었다.


그는 바다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임직원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닛산의 부활에 공헌할 기회는 모든 임직원에게 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임직원에게는 두 번 다시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협박(?)은 사실 곤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 역시 1년 안에 닛산을 살려내지 못하면 회사를 떠나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성공의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고, 실패하면 수정하는 식의 시행착오를 할 시간은 없었다. 이미 불길은 갑판까지 번져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2주 만에 혁신팀 구성


곤은 취임 2주일 만에 각 부문에서 혁신을 주도할 10개의 복합기능팀(Cross Functional Team·CFT)을 신설했다. 놀라운 스피드였다. 복합기능팀의 목표는 사업발전, 수익개선, 비용삭감이었다. 곤은 이를 가로막는 사내의 어떤 성역이나 터부도 용납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복합기능팀의 인원은 10명 남짓이었는데, 논의를 정리하는 역할을 하는 리더를 ‘파일럿’이라 불렀다. 3개월간 복합기능팀의 줄기찬 토론 끝에 드디어 신뢰할 만한 회생계획안의 본체가 완성됐다. 복합기능팀에 직접 참여한 사람은 200명 정도였지만, 실제로 이외에도 수백 명의 직원이 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이들은 그 기간에 무려 1000건이 넘는 아이디어를 면밀하게 검토했다. 이를 토대로 도출된 닛산의 재건 계획이 바로 ‘닛산 리바이벌 플랜(NRP)’이다. 재건 계획을 수립하는 동안 곤은 정보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만전을 기했다. 기자들이 닛산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아내려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탐문해 왔지만, 곤은 “재건 계획을 10월 도쿄 모터쇼에서 발표하겠다”며 취재에 불응했다.


곤이 이처럼 보안에 신경을 쓴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 계획이 사전에 알려지면 회사 안팎에서 여러 가지 우려가 제기돼 예기치 못한 저항에 밀려 계획이 수정될 위기에 봉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닛산은 회사 기밀이 쉽게 유출된다는 좋지 않은 평판이 있었는데, 곤은 이번 참에 그런 이미지를 불식시키겠다는 각오에서였다.


실제로 몇몇 정보가 사전에 유출되기도 했는데, 곤은 “회사에 상처를 주는 비밀 누설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며 “누설자가 밝혀지면 반드시 해고하겠다”고 경고했다. 도쿄 모터쇼에서 발표된 닛산 재건 계획의 목표는 1년 5개월 후인 2001년 3월 31일까지 흑자로 전환한 후, 2003년 3월 31일까지 영업이익률 4.5% 이상 달성하고 부채를 1조4000억 엔에서 7000억 엔으로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목표 달성 날짜까지 못 박은 것은 그만큼 계획이 치밀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구조조정 방안은 파격적이었다. 직원의 14%에 해당하는 2만1000명을 내보내기로 했는데, 일본에서만 1만 명 이상이 퇴출 대상이었다. 차량조립 공장 세 곳과 파워트레인 공장 두 곳을 폐쇄하기로 했으며 일본 내 잉여 생산능력을 30%나 삭감하고 차량 플랫폼을 24개에서 15개로 줄이기로 했다.


구매비용도 대폭 삭감하고 공급업자 수도 최소한으로 줄이기로 했다. 비핵심 계열사의 주식과 자산도 매각하기로 했다. 곤은 “이 공약을 어기면 닛산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1997년 당시 닛산의 일본 내 생산능력은 240만 대가 넘었다. 하지만, 실제로 생산된 차량은 128만 대에 그쳤다.


공장을 절반 가까이 폐쇄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경영진은 그러지 못했다. 공장 폐쇄에 따른 직원들의 고통이 부담으로 남아 공장은 그대로 두고 일부 생산라인을 폐쇄하는 식의 소극적인 절감만 있었을 뿐이다. 곤은 이런 식의 타협은 결국 회사 전체를 무너뜨리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공급자 많으면 단가가 오른다고?


그는 “생산라인을 폐쇄하면 부분적인 비용절감은 가능할지 모르나 이는 종양을 제거해야 하는 수술을 미루며 계속 진통제만 투여하는 것과 같다”며 “환자는 나아졌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몸속의 종양은 더 커져 몸 전체로 퍼져나가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복합기능팀은 총 5개 공장을 폐쇄하면 닛산의 공장 가동률은 50%에서 80%로 껑충 뛸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 정도 개선효과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곤은 공장 폐쇄를 강행하면서도 직원의 고통을 최소화할 방안을 모색했다. 당시 공장 폐쇄의 영향을 받는 직원은 5200명이었는데, 3480명은 다른 공장으로 옮기고 420명은 그 지역에 있는 닛산의 다른 사업장에서 근무하도록 배치했다.


그러고 나니 퇴직자는 1300명으로 줄었다. 이들 대부분은 살던 지역을 떠나지 않았는데 그것은 닛산이 이들의 재취업을 돕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 결과였다. 닛산의 부품 구매비용과 서비스 구매비용은 합병한 르노에 비해 훨씬 높았다. 일본 내 경쟁사와 비교해도 심한 경우 25%나 더 비용을 쓰고 있었다.


곤은 문제의 핵심을 찾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닛산이 타사보다 높은 구매비용을 지급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구매담당자의 안일한 태도였다. 그들은 회사 돈을 쓰고 있다는 이유로 사내에서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전문성을 가진 엔지니어들부터 무시당한다는 피해의식과 구매담당자가 잘해봐야 회사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패배의식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 돈도 아닌데 굳이 구매가격을 낮추려고 애를 쓸 이유가 없었다. 곤은 구매담당자가 최고 결정권을 가질 수 있도록 지위를 높여주고, 성과가 있는 경우엔 인센티브를 부여해주기로 했다. 또 엔지니어들에게도 구매담당자를 존중하고 적극적인 조언을 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구매비용이 높은 원인은 또 있었다. 공급업체 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었다. 일반적으로 공급자가 다수면 가격이 내려가게 마련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닛산에서는 오히려 공급가가 올라가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복합기능팀은 조사를 통해 그 원인을 찾아냈다. 그것은 닛산이 오랫동안 맺어온 공급업체들과 협력관계가 만들어낸 부작용이었다.


공급사 간 경쟁을 유도하지 않고 각 사에 공급량을 골고루 할당하는 식으로 계약을 맺어온 것이다. 그러니 어느 한 곳에서도 대량으로 납품 받지 못해 가격할인 없이 제값을 다 주고 구매할 수밖에 없어졌고, 공급사 수가 계속 늘면서 각 사에서 납품 받은 비용도 지속적으로 높아지게 된 것이다.



복합기능팀은 공급업체들을 직접 설득하고 나섰다. 닛산보다 낮은 가격에 부품을 공급받는 경쟁사들의 데이터를 제시하며 “우리의 목표는 최고 20%까지 단가를 줄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급사들 입장에선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지만, 사실 닛산에는 재건을 성공시킬 만큼 획기적인 삭감은 아니었다.


그저 경쟁사들과의 격차를 없애는 정도였다. 공급사들을 진짜 경악하게 한 것은 거래중단이었다. 닛산은 3년 안에 부품·자재 공급사를 1145개에서 600개 이하로 줄이고, 설비기구와 주요 서비스 공급자를 6900개에서 3400개로 반감하기로 했다. 선택된 공급자는 이전보다 두 배 이상 많은 납품량을 확보하게 돼 자연히 공급가를 내려야 했고, 닛산과의 거래선을 놓칠세라 품질과 납기를 맞추기 위해 바싹 긴장하게 됐다.


닛산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이다. 어느 공업업체 사장은 “닛산이 살아야 우리도 산다”며 닛산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기도 했다. 곤에게 ‘코스트 킬러(cost-killer)’라는 별명이 생긴 것도 그 즈음이다. ‘닛산 3-3-3’이라 불리는 계획도 닛산 재건에 큰 몫을 했다.


3개의 파트너(공급업자·구매담당자·엔지니어)가 팀워크를 이루어 3개 지역(일본·아시아, 북미·남미, 유럽·중동·아프리카)에서 3년간 지속적으로 혁신을 추진해간다는 뜻이다. 고객이 원하는 제품 사양과 성능을 실현하는 것이 핵심이다. 닛산이 절감만 한 것은 아니다. 곤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미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비용절감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감과 동시에 성장을 위한 투자가 있어야 했다. 22개의 신제품을 출시한다는 계획은 그렇게 나온 것이다. 그중엔 이미 개발 중인 블루 버드 실피, 엑스트레일, 프리메라, 시마, 캐러밴, 스카이라인, 스테지아 등 7개 차종의 모델도 포함됐다.


혁신의 질주로 일본 영웅 되다


기술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엔지니어링에도 과감한 투자를 했다. 여기에 필요한 새로운 인재를 채용하고 세계 각지에 테크니컬 센터도 착공했다. 브라질 르노의 메르코슬 공장에는 닛산 차를 생산하기 위해 3억 달러나 투입했다. 이 공장에서 프런티어 픽업도 생산하기로 했다. 이어 미국 테네시주 스메나 공장의 생산능력을 50% 이상 늘리고, 데카드 공장의 파워트레인 생산능력도 3배나 증가시키는 투자를 강행했다.


미시시피주 캔턴에는 연간 25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지었다. 대형 픽업트럭과 대형 SUV 시장 진입을 노린 투자였다. 인도네시아 계열사에 출자하고 스즈키와 제휴해 경자동차 시장에도 진입하고, 르노와 공동으로 연료전지 연구개발에도 5년간 850억 엔을 투자한다는 결단도 내렸다.


이 모든 것이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만 본다면 아무 의미 없는 투자였지만, 곤은 망설이지 않고 사인했다. 몸집을 줄이면서 동시에 체력을 키우는 다이어트를 한 것이다. 미래에 대한 투자는 실제로 위기 탈출 후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글로벌 시장에서 놀라운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곤은 총 4200억 엔어치의 자산(85%)을 매각했으며, 20개 판매회사의 사장을 교체했다. 이 밖에도 중간 관리층을 교체하고, 엄격한 채용 조건을 제시했으며, 영어 특별 연수 등 혁신의 질주를 계속했다. 과감한 구조조정과 공격적인 신차 투입 등으로 닛산은 2000년 56억 달러 적자에서 2001년 3720억 엔 흑자로 돌아섰으며, 영업이익률은 11.3%에 달했다.


1조4000억 엔에 달하던 부채도 모두 변제했다. 2003년도 결산에서도 전년 대비 9% 증가한 4643억 엔의 사상 최대 순이익을 냈다. 닛산 차 판매량은 연간 50만 대나 늘어났다. 곤이 탈출 선언을 했을 때, 주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COO에 취임할 당시 “일본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 경영자가 닛산을 제대로 경영할 리 없다”고 했고, 비용절감의 효과가 나타난 후에도 “미스터 곤은 쉬운 부분만 손봤을 뿐이며 지금부터는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곤은 반론 따위는 하지 않았다. 북미 미셸린 CEO 시절 1000%가 넘는 인플레로 회사가 고비를 맞았을 때도 곤은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과 추진으로 위기를 극복한 전력이 있다. 그때도 여론은 부정적이었지만 곤은 성과로 입증했다. “일본을 모른다”는 비판을 받던 곤은 2004년 외국인 경영자로는 처음으로 일본 정부가 공공의 이익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훈장인 ‘남수포장’을 받았다. 일본 재계의 영웅으로 떠오른 곤은 만화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이코노미스트 이임광 기업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