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책(冊)

인간은 왜 전쟁을 혐오하고 또 사랑하나

물조아 2008. 12. 6. 05:58

〈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 제임스 힐먼 지음·주민아 옮김/도솔·1만4500원, 분석심리학으로 전쟁열광 탐구, 전쟁문학·증언 신화적 성격 주목, 탐미적 잔인성이 무의식의 핵심


미국 심리학자 제임스 힐먼이 쓴 <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은 제목 그대로 ‘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의 기원을 심리학적으로 탐사하는 책이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카를 융의 분석심리학을 오래 연구한 지은이는 융이 제시한 ‘원형 심리학’을 도구로 삼아 인간의 심층심리를 굴착한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가 방대한 인문학 지식을 기반으로 삼아 심리학의 영토를 개척했듯이, 지은이도 신화·철학·신학을 종횡하며 자신의 주제를 파고든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경험을 바탕에 깔고 참전자·종군자들의 증언·관찰·고백을 주요 증거 자료로 끌어들인 뒤, 인문 지식들을 동원해 사태를 해석한다.


책 속에서 지은이는 자신이 전쟁을 혐오하면서도 전쟁에 매료됐음을 고백한다. ‘공포 속의 매혹’이라고 할 이 심리를 이해해보려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주전론자이거나 호전론자인 것은 아니다. 조지 부시의 이라크 침략 시기에 쓴 이 책은 인간의 광기어린 전쟁 열광을 어떻게 하면 제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밑에 깔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모순적인 저작이다. 전쟁을 근본적인 것으로 보면서 동시에 전쟁을 극복할 방법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전쟁을 인간 심리 저 안쪽에 자리잡은 원형이라고 말한다. 원형(아키타이프)이란 자기반복적 행동 패턴을 일으키는 근원적 충동을 가리킨다. 전쟁이 이 원형의 발현이라면, 역사서들의 전쟁 원인 서술은 표면적인 설명은 될지언정 근본적인 설명은 되지 못한다. “전쟁은 심리학이 풀어야 할 숙제다.” 전쟁을 알려면 인간의 심층심리를 고고학적으로 탐사하고 발굴해 그 최저층을 드러내야 한다. 전쟁을 일으키고 수행하는 사람들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거기에 ‘이해’의 조명을 비춰야 하는 것이다. 이때 이해의 필수조건으로 지은이가 거론하는 것이 상상력과 통찰력이다. 상상력은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며, 통찰력은 거기서 중요한 심리학적 유물을 발견하도록 해준다.


지은이는 신화를 통해 심층심리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신화는 심층심리가 이야기의 형태로 다채롭게 펼쳐진 세계다. 전쟁 자체가 신화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신화와 심리의 결속을 보여준다. 수많은 전쟁 문학·증언들이 전쟁의 신화적 성격을 이야기한다. 지은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전쟁과 사랑, 전쟁과 아름다움이라는 테마다. 전쟁 속의 증오가 사랑이라는 고귀한 정신과 결합하고, 전쟁의 끔찍한 폭력이 아름다움과 하나가 된다.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는 이 결속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 신화 속 전쟁의 신은 마르스(로마신화) 또는 아레스(그리스신화)다. 이 신들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신 아프로디테(비너스)와 동침한다.


1914년 서부전선에 있던 독일군 병사는 이런 꿈을 꾸었다. “어떤 방에 들어갔는데,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자가 날 만나러 왔다. 그 여자에게 입맞추고 싶어서 다가갔는데, 해골이었다. 한순간 공포로 온몸이 얼어붙었지만, 그 해골에 입을 맞추었다. 너무나 열렬하고 격렬하게 입을 맞추었다.” 지은이는 이 꿈 이야기를 전하면서 해석을 덧붙인다. “이런 결합 양상 때문에 그 짧은 한순간에 전쟁은 참으로 장엄하면서 끔찍한 것, 잔인하면서 초월적인 것으로 변한다.” 전쟁은 숭고한 것이 된다. 2차대전 당시 런던 공습을 목격한 사람은 이렇게 썼다. “그곳은 펑펑 터지는 유탄 때문에 분홍빛 포화로 뒤덮였다. 지금까지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럽고도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냈다.” 전쟁의 공포는 너무나 쉽게 아름다움으로 변해 버린다. 전쟁은 “잔인한 타나토스(죽음) 영역에 깃든 필사적인 에로스(사랑),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악한 아름다움’이 “여신의 몸체와 마녀의 영혼을 지닌 곳,” 다시 말해 ‘전쟁터’에서 꽃핀다. 이 공포스러운 매혹에 대한 열정은 통제할 수 없다. 그곳이 바로 ‘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이 드러나는 곳이다.


지은이는 탐미적 잔인성이야말로 인간 무의식의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그 요소를 지배하는 신이 마르스 혹은 아레스다. “마르스건 아레스건 신이란 존재는 전쟁의 원형적 힘, 수많은 호전적인 태도와 행위들의 원형적 힘이 신화적으로 인격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 신들이 로마 시대를 거치며 기독교의 유일신 안으로 통합됐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기독교는 아레스·마르스를 인정하지 않지만, 그가 보기에 기독교 정신의 심층에 놓인 것은 호전적인 신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사랑과 평화라는 위선의 말 안에 든 호전성의 본질을 보는 것이다. 그 위선을 자각할 때에야 비로소 “일신교적 종교에 뿌리박은 전쟁의 뿌리를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결론은 전쟁의 심리학적 기원에 대한 긴 탐사에 비하면 짧고도 허약하다. 이 책의 가치는 결론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