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쉴 수 있어 (感謝)

살아 있다는 건? 신비로운 축복!

물조아 2008. 7. 31. 11:13

극단 산울림 ‘방문자’… 내달 12일부터 신촌 산울림소극장 김승현기자


극단 산울림은 한국 신연극 100주년을 맞아 연극연출가 대행진 시리즈 두 번째 무대로 중견 연출가 심재찬씨가 연출한 ‘방문자’를 8월12일부터 서울 신촌 산울림소극장에서 막을 올린다. 이 작품은 ‘부부 사이 작은 범죄들’ ‘수수께끼 변주곡’ 등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익숙한 프랑스의 작가 에릭에마뉘엘 슈미트 원작으로 삶의 이면을 꿰뚫는 슈미트 특유의 날카로운 사변이 빛난다. 29일부터 무대 연습에 들어간 ‘방문자’를 미리 봤다. 주인공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꾼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남희)와 그의 딸 안나(이혜원), 독일군 비밀경찰(김은석), 그리고 정체불명의 남자(김수현)다.


나치 치하의 오스트리아 빈에 살던 유태인 프로이트는 나치로부터 아무 불편 없이 학문연구에 진력할 수 있었다는 서류에 서명만 하면 망명을 허용하겠다며 서명 종용을 받는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양심상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또 자신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빈을 떠나기도 싫다. 그래서 독일군 비밀경찰에게 돈을 주며 남아있다. 그러나 딸 안나가 비밀경찰과 맞닥뜨려 싸우다가 끌려가면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때 정체불명의 사람이 나타난다. 그는 정신병원을 탈출한 정신병자로도 보이며, 인간의 모습을 한 신으로도 여겨진다. 정신병자와 신을 오가는 묘한 지점의 남자와 프로이트가 벌이는 논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60여년 전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 살아 날뛰는 현대의 악령, 미신, 과학문명 등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악이란,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오. 죽음이라는 게 결국 뭐요? 여기, 내 피 속에, 내 살 아래로 흐르고 있는 삶의 약속,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 아닌가요? 내가 내 몸을 만져볼 때, 내가 존재한다는 순수한 행복에 도취해 있을 때, 나는 죽음을 느끼지 않아요. 죽음은 아무 데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뒤통수를 치죠. 나 자신으로부터, 난 완전히 다른 길을 떠났던 거고, 내가 영원할 거라고 믿어왔었죠. 죽음 속에 있는 악은 완전한 소멸이 아닙니다. 지켜지지 않은 삶의 약속이죠. …고통이란 또 뭘까요? 육체가 온전하다는 믿음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아닌가요? …도덕적인 악이란, 인간들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악이란, 애초의 평화가 깨진 것 아니던가요? …하지만 가장 심각한 악은, 그래요, 너무 뾰족하고 날이 서있어서 어떤 존재도 위로받을 수 없는 그런 악은 바로 우리의 정신이 제한되고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정신의 한계, 이것이 신이 지키지 않은 마지막 약속입니다. 이런 배신이 없었더라면 삶은 아름다웠겠죠.”(프로이트)


“…인간의 오만함이 이렇게까지 멀리 왔던 적은 없었네. 인간의 오만함이 신과 대결하는 걸로 만족하던 때가 있었지. 그런데 오늘날엔 그게 아예 신을 대신해버렸어. …자네들은 작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어. 필요없다고 생각한 것들을 다 걷어치워버렸지. 세상은 그저 우연의 산물이고, 분자들의 혼란스러운 조합에 불과하다! 주인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상태에서, 이제 규칙을 정하는 건 자네들이지. …이런 광기가 금세기만큼 고개를 든 적은 없었다네. 자연의 주인이 되어, 자네들은 땅을 오염시키고, 구름을 더럽히겠지! 물질의 주인이 되어, 자네들은 세상이 흔들리게 하겠지! 정치의 주인이 되어, 자네들은 전체주의를 만들어내겠지. 삶의 주인이 되어 아이들을 목록에 있는 물건 고르듯 선택하겠지. 몸의 주인이 되어 자네들은 병과 죽음이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어떤 대가라도 달게 치르며 버텨내려 하겠지. …처음에 자네들은 신을 죽인 것에 대해 축하하겠지. 만약 모든 것이 신에게서 비롯된 게 아니라면, 결국 모든 건 인간한테 되돌아오는 거니까. …자넨 그들에게 어떤 세상을 남겨줄 것인가? 빛나는 무신론! 이전의 모든 시대보다 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미신!”(정체불명의 남자)


프로이트와 미지의 남자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인간의 삶과 역사, 철학, 정치, 사회, 과학에 대해 벌이는 치열한 논쟁은 현대가 잃어버린 자유, 믿음, 신뢰 등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정체불명의 남자는 프로이트에게 “삶의 부조리 대신 삶의 신비를 찾으라”고 말한 뒤 창문을 통해 달아난다. 프로이트는 비겁한 그 남자 또는 신(神)에게 총을 쏘았다. 하지만 빗나간다. 살아있는 것의 황당함을 부조리가 아니라 신비로운 축복으로 받아들이라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9월28일까지. 번역 임수현. 02-334-5915 문화일보 김승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