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현대인들은 머리 회전이나 동작이 느린 사람보다는 민첩하고 빠릇빠릇한 사람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내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바로 느림이 존재하는 영역이다. 즉 느림. 내게는 그것이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으로 보여 진다.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 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한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또한 삶이란 내게 주어진 행운, 그것도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단 한번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매 순간 살아 있는 존재로서 아침마다 햇살을, 저녁마다 어두움을 맞이하는 행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만물이 탄생할 때의 그 빛을 여전히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류에게 똑 같이 부여된 이 삶이라는 특권을 참되게 누리기 위해서, 나는 나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것은 오직 시간에게 쫓기는 괴로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2.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
지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흥분감, 기쁨과 고통이 뒤섞여 있는 바로 그 흥분 감이 그들로 하여금 한계량 이상의 에너지를 방출하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오늘날에 들어와서는 아주 새로운 현상이 하나 생겨났다. 활동하는 것을 오히려 매우 고귀한 가치로 여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가로이 거니는 것은 그것은 시간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게 쫓겨 몰리는 법 없이 오히려 시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3. 듣기
육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누군가가 우리에게 조언해 준 바 있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행위는 타인을 위로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듣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우리는 타인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그를 최고의 상태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말하는 사람은 진심을 털어놓고 말할 용기를 가져야 하고, 듣는 사람 쪽에선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마음 자세를 가질 때만이 그런 만남이 가능하다. 어쨌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 안에 빈 공간을 만들 수 있음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빈 공간은 내 모든 존재를 던진 노력을 통해서만 확립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이면서도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그 점은 수정할 필요가 있다. 말을 하는 쪽은 대개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새로운 특권을 누리고 있는 자들이다. 같은 맥락에서, 듣는다는 것은 명령을 듣고 그 명령에 복종하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말을 하는 권리보다는 의무를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빈말이 아닌 의미 있는 말, 권태롭지 않은 말을 하여 공동체를 매혹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정부가 완전히 무의미한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의 경우는 어떨까? 그들은 귀를 기울여야 할 의무가 아니라 듣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만일 지도자가 말하고 있는 동안 국민들이 거리낌 없이 먹고, 장난치며, 휴식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그렇게 되면 지도자들은 백성이 자기들 말을 듣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마침내 그 번지르르한 말들을 멈추게 될 것이다. 안 그런가?
4. 기다리기
우리가 때때로 기다림을 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요즈음엔 육체의 급속한 성장으로 그런 단계들을 단번에 훌쩍 뛰어넘는 데 성공했다고 믿는 듯하다. 우리로 하여금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하나도 없고, 가능한 것도 전혀 없는 상황, 그래서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다릴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이 과연 존재할까? 그럴 때 인간은 완전한 좌절을 맛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기다림’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우리가 미래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과 ‘우리의 현재 모습’사이의 거리를 말한다.
5. 글쓰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만들되,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전해 주기 위해서라든가 자신의 재능을 과시할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참모습에 더 접근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동안 내내 ‘게으름을 피우지 않기’위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라면, 삶에 대한 성찰이라든가 분석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그런 작업에는 반드시 인내와 겸손이 필요한 것이다. 다만 지금 자신의 가장된 모습에 속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 가운데서 작업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맡은 임무에 충실해야 하며, 동시에 주위의 것에 전혀 무관심해도 안 된다.
세상은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해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비밀스러운 기호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느림은 민첩성이 결여된 정신이나 둔감한 기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며, 어떤 행동이든 단지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급하게 해치워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은 언어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들은 기존 언어에서 찾아내거나, 언어의 몇몇 요소들을 서로 바꿔 가며 사용하는 것이다.
6. 모데라토 칸타빌레
절제, 그것은 대수로울 것 없는 교활한 미덕일까? 숭고함이라는 미덕에 필적하기 위해서는, 또는 다른 가치,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단을 사용해야만 하는 걸까? 가치 있는 사람? 우리는 타인들보다 더 많은 은총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성공을 의미하며, 우리가 뛰어난 존재임을 뜻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타인을 유혹하고 부패시키고, 우리를 인정하게 만들려는 온갖 시도들이 생겨난다. 우리에 대해 타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본래 우리의 모습이 서로 같다는 생각도 그와 같은 그릇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믿음에 저항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끊임없이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은 능력을 지니고, 더 나은 가치를 지니고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같은 욕망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애정이 결핍되었을 때 나타나는 결과이다. 우리를 이 같은 광기와 상스러운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곧 절제라는 태도이다. 절제는 합법적인 야망을 지니고 살아갈 때,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악한 악마들을 쫓아낼 필요가 있다. 절제라는 미덕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나는 ‘적은 것으로 살아가는 기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적은 것으로 살아가는 기술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적은 것만으로 만족하도록 선동하여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적은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기술은 결코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능란한 솜씨를 필요로 한다. 적은 것으로 살아가는 기술은 살아가는 방법, 곧 지혜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함부로 비판하지 말 것,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 것, 상황이 제공해 준 것, 사회 계층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을 비통한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 것, 시도해 봤다는 자긍심을 갖기 전에 자신의 취향과 운명에 따라서 착실히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갈 것 등이 그것이다. 나는 그들의 작은 울타리 안에서 참으로 부러운 행복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내가 부러워하는 행복이란 안락함이나 성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소박한 기쁨을 맛보고, 그런 기쁨들과 조화를 이루는 능력, 그리고 그런 기쁨을 자주 만들어 내는 능력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고부터 발걸음을 더 바삐 움직인다. 그들은 보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맛보아야할 요리가 너무 많으며, 방문할 곳도 너무 많고, 함께 걷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억제할 길 없는 이 같은 나이에 공복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은 한창 활동적인 나이에 디저트도, 메인 요리도 다시 일터로 나가 몸을 불사르기 전에 잠깐 회복할 시간만 허락해 주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노년에 이르러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 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더 이상 늦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을 밀어붙인다. 그들에게는 이제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7. 리듬의 교체
느림을 하나의 미덕으로 볼 수 있을까? 아닐까? 이에 대한 견해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느림은 무감각일까? 아니면 의지 결핍일까? 무력감의 원인을 어떤 식으로 옹호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타산적인 계산이나 계략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되겠지 하고 내버려둔다거나, 불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까봐 아예 처음부터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스스로 해결되는 어려움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풀려지는 것이라면 이미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뜻일 테니까. 당황한 일을 만나면 그저 망연자실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느림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원할 때는 언제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무관심은 또 어떤가? 그것은 게으름의 한 징조일 수도, 있다. 혹은 사회의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잘못 이해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반응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긴급한 처리 방식에 대한 경멸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런 경멸은 동물의 왕인 사자의 것과 흡사한 절대적인 주권을 지닌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긴 세월 동안 축적된 조심성이 읽혀진다. 그들은 매우 조용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필요한 순간이 오면 그 조용한 힘은 가공할 만한 무서운 발톱 질로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느림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일단 삶이 우리의 기대에 부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약간의 인내심만 있으면 삶의 수많은 의미들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 아래 느림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느림을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즉흥적인 행동의 특징을 과소평가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머뭇거리는 태도가 자기주장을 못하게 할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조금도 후회 없이 느림에 대한 나의 예찬을 망설이지 않고 당당하게 펴나갈 것이다. 느림이야말로 내가 세상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이 세상, 결코 벗어나고 싶지 않은 이 세상으로 접근할 수 있는.
8. 분주하지 말기
느림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갖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로 하여금 불필요한 계획에 이리저리 정신을 빼앗기지 않고 명예롭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내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은 상대는, 내가 어떤 식으로 행동하던 간에 결국 나를 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내일, 다시 한 번 나는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존재로 있을 수 있는 이 행복한 기회를 소중하게 누릴 것이다.
“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 ” - 파스칼-
'10.5.26 '12.1.2 201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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