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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에타이 女챔프 임수정… 그녀는 왜 격투기에 빠졌나

물조아 2008. 4. 5. 18:23

   엠파이트   무에타이 임수정

 

살 빼려고 시작했는데, 미들킥 차면서 戰士의 피가…


지난달 30일 저녁부터 여러 대형 포털 사이트 인물검색 코너에 이변이 일어났다. '임수정'이라고 입력하면 당연히 맨 먼저 떴을 미녀 배우 임수정이 뒷전으로 밀리고 동명(同名)의 격투기 선수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날 이 스물다섯 여전사(女戰士)는 자기보다 키가 10㎝나 큰 아쉬리(호주)의 얼굴을 '피떡'으로 만들며 TKO승을 거뒀다. 유혈은 일본의 K1에 대항하겠다며 한국이 만든 '더 칸(KAHN)'대회장 서울올림픽공원 특설 링에도 낭자했다.


■양팔 없는 스승과 미녀 제자


홍콩의 전설적인 액션스타 이소룡(李小龍)이 쿵후 붐을 일으켰던 1970년대 이색 대결이 열렸다. 쿵후와 킥복싱 대표 5명이 '맞짱' 뜬 것이다. 결과는 킥복싱의 완승. 절대 무공처럼 보였던 쿵후를 깬 킥복싱의 원류가 태국 무술 무에타이이고 임수정은 한국 여성 무에타이의 1인자다. 그는 한국 무에타이협회 밴텀급 챔피언이자 네오파이트 53㎏급 우승자다.


임수정의 도장이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한양아파트 부근 '삼산 이글체육관'이다. 40평 지하실에서 이기섭 관장(40)이 기자를 맞았다. 명함을 나누다 보니 양팔이 의수(義手)다. 무에타이 5단인 그는 "사고로 두 팔을 잃었다"고 했다. "이런 사람에게 무에타이를?" 하고 생각하는 순간 이 관장은 독심술(讀心術)이라도 익힌 듯 "팔이 없어도 가르칠 수 있다"고 했다. 잠시 후 임수정이 나타났다. 안경을 쓴 예쁘장한 얼굴이다. 몇 마디 나누다 트렁크로 갈아입자 다른 사람이 됐다. 눈에 독기(毒氣)가 서리고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배를 만져보니 근육 덩어리다. 앉으면 배 한가운데 '왕(王)'자가 뚜렷하다. 주먹을 만져보니 돌주먹이다. 이 관장은 "수정이는 오른손이 더 세다"고 했다. 허벅지도 경주마(競走馬)처럼 단단했다.


■온몸이 흉기지만 건달 보면 피한다


"나 같은 사람을 몇 방에 보낼 수 있느냐"고 하자 사제가 웃었다. 정권(正拳)으로 맞으면 기절, 팔꿈치면 피부가 북 찢어진다고 한다. 미들 킥으로 종아리를 맞으면 뼈가 부러지고 하이 킥으로 목 부분을 맞아도 몇십 분 동안 정신을 잃는다고 했다. 몇 분 전 미인의 이미지는 종적을 감췄다.


내친김에 "동네 건달들이 집적대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이번에도 임수정은 예상과 다른 답을 내놓았다. "그냥 피하거나 도망쳐요. 위기를 감지했을 때는 피하는 게 최고거든요." 아! 누가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 했는가.


임수정이 샌드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쉭쉭' '팡팡'…. 소리는 샌드백뿐 아니라 임수정의 입에서도 나왔다. 내공 실린 기합이다. 한글로 옮기기 힘든 요상한 파열음은 계속 쏟아졌다. 독사가 상대를 공격하기 전에 내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임수정의 양 훅과 미들 킥, 하이 킥에 무릎차기, 팔꿈치를 다섯 박자로 얻어맞은 붉은 샌드백은 곳곳이 기워져 있다.


"고2 말(2003년)에 살을 빼려 무에타이를 시작했어요. 제 키가 165㎝인데 당시 몸무게가 58㎏이었거든요. 그런데 한 달 동안 스텝 배우고 스트레이트 치는 법, 미들 킥 차는 법 배우면서 무에타이에 빠지기 시작했어요. 경기는 2004년 7월 처음 치렀죠."


■우등생에서 파이터로


북가좌초등학교, 연희여중을 거쳐 당시 성동여실에 다니던 임수정은 성적이 상위 3등 안에 드는 우등생이었다고 한다. 그런 딸이 살을 뺀다며 무에타이 도장에 다니는 것도 못마땅했던 어머니는 '무에타이 선수가 되겠다'는 선언에 놀라 자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단식 투쟁까지 벌이는 딸을 이기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다.


"운동을 좋아하는 집안이냐"고 묻자 임수정은 "그렇지 않다"고 했지만 이 말은 거짓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북파(北派) 공작원 출신에 배드민턴을 잘하고 오빠는 축구선수, 어머니 역시 마을 체육대회 육상 부문에 도맡아 출전한다고 했다. 임수정 역시 어렸을 때 태권도를 익힌 바 있다. 피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다.


임수정의 현재 전적은 18승(7KO)7패. 외국 선수에게 네번, 국내 선수에게 세 번 졌다. 국내 선수 중 유일하게 신민희가 그를 두 번 이겼지만 작년 8월 임수정은 삼세번 만에 설욕에 성공했다. 85년 동갑내기이자 용인대 격기지도학과 동급생인 신민희는 임수정과 한국 무에타이에서 쌍벽을 이루는 존재다. 둘은 올해 안에 네오파이트 53㎏급 왕좌를 놓고 재격돌한다고 한다.


■펀치력 기르려 하루 500번 푸시업


임수정의 기술은 진화하고 있다. 이기섭 관장은 "전에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스파링하다 맞으면 아프다"고 했다. 펀치력을 기르려 임수정은 하루 푸시업을 500회 이상 한다. 자동차 타이어로 만든 질긴 고무를 손에 묶고 계속 펀치를 뻗는다. 종아리 내구력(耐久力)을 높이려 예전에는 홍두깨나 병으로 종아리 뼈를 내려쳤지만 지금 그런 '무식한 수련'은 없어졌다고 한다.


임수정은 북가좌동에서 연세대 뒷산인 안산(案山) 정상까지를 30분 내 달리는 로드워크도 한다. 작년 12월에는 3개월간 무에타이의 본고장인 태국으로 전지훈련도 다녀왔다. 현지 도장에서 각국 선수들과 기량을 겨뤘다. 때마침 열린 세계 아마추어 무에타이 챔피언십에 출전, 3위에 오르기도 했다. 30일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호주의 아쉬리는 지독히도 '운'이 없었던 것이다.


■‘옹박3’에선 악당역으로 출연


이렇게 때리고 혹은 맞으면서 그는 얼마를 벌까. 사제는 "신문에 쓰면 안 된다"면서도 정확한 액수를 말해줬다. 보통 선수보다 2배 높지만 기자가 보기에 '매 값'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그래서 기자는 '농'을 걸었다. 혹시 CF제의가 들어오면 하겠느냐고. 임수정은 "운동복 광고라면 몰라도…"라고 했다.


임수정의 별명은 '파이팅 뷰티(Beauty)'. 그런데 본인은 '얼짱'이라는 말을 싫어한다며 "몇 년 전 여자 악당으로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대박 친 무에타이 영화 '옹박'의 3탄 격인 '초콜릿'(국내 미개봉작)이라는 영화에서 정의의 여주인공과 맞서 수십 대 맞고 뻗는 역이었다. "그 여주인공과 실전을 한다면"이라고 묻자 이 야누스 같은 처녀는 "제가 반쯤 죽여놨겠죠"라며 씩 웃었다.


무에타이(Muay Thai)는 1000년 역사를 가진 태국의 전통 무술이다. 손발뿐 아니라 무릎, 팔꿈치 등 머리를 제외한 전신을 타격도구로 사용한다. 눈을 찌르거나 물기, 목 조르기, 사타구니 공격은 반칙에 해당된다. 경기 방식은 1라운드 3분 또는 5분간으로 3~5라운드를 겨룬다. 체급은 복싱과 같다. 원래는 손에 붕대만 감고 경기를 했으나 타격 강도가 너무세 글러브를 끼고 경기를 한다. 조선일보 문갑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