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가고 따사한 봄기운이 찾아오는 이 무렵이면 까까머리 고등학교 신입생 시절이 생각나곤 한다. 유명한 사상가의 명언 몇 마디로 잘난 체하려던 철없던 시절 윤리 선생님이 알려주신 ‘지족수분(知足守分)’의 뜻은 많은 교훈을 주었다. 분수를 지켜 만족함을 안다는 말이다. 이후 중요한 순간마다 불현듯 떠오르던 이 말이 요즈음 우리 사회에 매우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흔히 말하는 훌륭한 리더십을 갖춘 정치가(statesman)는 사라지고 욕심 많은 정치꾼(politician)만이 나라를 지배하는 듯하다. 나라의 일상사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가 이러하니 사회 곳곳이 승자독식의 논리에 취해 극단적 경쟁 일색이다. 양보와 협상의 지혜와, 패자를 배려하는 승자의 아량은 찾아보기 어렵다.
경쟁의 장이 기업이든, 정치든 관계없이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승리한 계파의 가치를 패자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독선의 리더십이 기승을 부린다. 이러한 독선의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들 주변에는 개인적인 욕심을 감추고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이 인의 장막을 치고 있으니 아첨과 세력 다툼을 기피하는 충직한 다수의 사람들은 자연히 지도자들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지도자가 조직을 장악하면 개혁의 미명 아래 구조조정이 벌어진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적용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잭 웰치 방식의 구조조정이다. 업무 성과와 능력을 계량화하여 일정 비율에 속하는 하위의 사람을 정리해고함으로써 끊임없이 조직 구성원에게 긴장감을 주어 생산성을 극대화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제너럴 일렉트릭(GE)과 같이 대량생산은 외주를 주고 유통과 금융을 통해 이윤 추구를 극대화하는 조직에는 최적의 리더십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유능한 사람이 먼저 조직을 떠나 조직 자체의 경쟁력이 오히려 퇴보하는 사례가 매우 많다는 데 있다. 더구나 생산 기술보다는 창의성을 요구하는 첨단 지식기반 산업 분야나 다양성과 역사적 전통이 중요시되는 정치·행정·문화·대학과 같은 분야에서는 구조조정 위주의 독선적 리더십이 초래할 부작용이 매우 크다.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과 같은 회사는 업무 공간을 마치 휴식 공간처럼 꾸며 놓고 비용 절감과 생산 효율 제고보다는 창의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기업의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려 한다. 우리의 경우 이윤 추구와 무관하며 창의성과 다양성을 생명으로 하는 분야에서조차 뒤늦게 생산량 기준의 계량적 업무평가와 구조조정이 마치 선진관리 기법인 듯이 퍼져나가고 있다. 물론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을 조직에서 제거하여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분야의 특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수치적 업적에만 의지하여 인적 청산을 주장하는 리더십으로는 지식기반 경쟁사회에서 결코 일류가 될 수 없다.
사실 우리나라처럼 짧은 기간에 산업 고도화를 이룬 나라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다. 더구나 자동차·조선·정보기술(IT)·생명기술(BT)·문화기술(CT) 및 이들의 융합 기술 등 첨단 분야의 신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민·관·학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시점에 국가의 리더십 교체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책 주도층에는 첨단 과학기술 분야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고위 관료가 극히 드물다. 오히려 분야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피상적 수치에 의존하는 구조조정 전문 관료들이 부처 주도권 싸움에 몰두하는 모습만 보인다. 하는 일이 지금껏 이뤄 놓은 과거의 산업 경쟁력 확보와 같은 업적을 부정하는 일이다.
정권과 관계없이 열심히 일한 전문가들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기업이나 대학, 국가 등 조직 규모에 관계없이 그 조직이 초일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구성원들에게 구조조정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강제로 참여를 요구해서는 결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스스로 열심히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 최상이다. 모름지기 지도자라면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강제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평범한 격언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화일보 / 김성철 서울대 교수·전자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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