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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거인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물조아 2007. 6. 30. 00:03

역사의 거인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로마인이야기)천재형 리더십과 노력형 리더십비교

 

결단


"강을 건너면 인간세상이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50세의 카이사르는 이 말을 남기고 루비콘 강을 건넜다. 그리고 새로운 로마가 시작되었다. 카이사르가 로마세계에 남긴 유산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제국의 최종방위선.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평정하고 게르만족과 대치한 라인 강을 로마의 최종방위선으로 확정지었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마가 멸망하기까지 몇 백년간 계속 유지된다.


둘째,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이행. 카이사르는 그 자신이 독재관이 되어 제정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젖혔다. 넓어진 제국을 다스리는 데는 원로원 중심의 다수지배체제보다는 황제의 일인지배체제가 훨씬 효율적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보수파의 반발심을 불러 일으켜 결국 카이사르 자신의 암살을 초래했다.


셋째, 관용의 정치. 카이사르는 내전을 일으켰지만 반대파도 수용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대화합을 표방했다. 이것은 남다른 인간의 크기를 보여주는 보기 드문 역사의 유쾌한 사례이기도 하다.


리더에게 요구되는 자질 다섯 가지는? 지성, 설득력, 지구력, 자제력, 지속적 의지.

 

▲지성 : 카이사르는 당대의 석학 키케로와 대등하게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독서가였지만, 고지식한 공부에 매몰되지 않았고, 현실세계의 선후관계를 정확히 판단하여 구체적인 성과들을 남겼다.


▲설득력 :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설득하여 삼두정치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군단병들이 파업했을 때, 단 몇 마디로 그들을 결전에 참여시킬 수 있었다.


▲지구력 : 카이사르는 8년간의 갈리아전쟁을 지치지 않고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속전속결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을 보았을 때,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활기를 갖춘 사나이였던 것이다.


▲자제력 : 카이사르는 자기를 죽이려 했던 반대편도 대의를 위해 받아들일 만큼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역사에 업적을 남긴 모든 위인들의 공통점은 큰 뜻을 위해 순간의 쾌락을 자제하고 잠깐의 굴욕을 견뎠다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지속적 의지 : 카이사르가 협상을 통해 삼두정치를 이루어내고, 갈리아 전쟁을 수행했으며, 그 이후에 내전을 승리로 이끌어낸 것은 모두 새로운 로마의 건설이라는 이상과 자신의 야심을 위한 것이다. 그의 가슴 속에는 큰 그림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었고, 그것을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을 치열하게 밀고 나갔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분명 의지의 인간이다.

 

의지

 

"천재가 아닌 인물이 천재가 도달하지 못한 목표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대답은 보고 싶지 않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는 카이사르의 말. 인간은 선행된 경험이나 현재 자신의 관심분야에 따라 정보를 걸러내어 받아들이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인간의 선택적 인지를 뇌의 필연적 기능으로 파악하고 있다. 두뇌가 정보를 취사선택해야 수없이 난립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일정한 목적 하에 행동방향을 수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두뇌의 효율적 기능은 그 자체로 인간의 한계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잘못된 정보들을 수집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의 인간들이 이러한 함정에 쉽게 빠져버린다. 천재는 이런 함정이 없으니까 천재인 것이다. 그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당연하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천재가 아닌 사람들이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런 함정들을 피해가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른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이 천재의 창조력으로 연결되는 첫걸음이다. 즉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일이 잘 안 풀릴 때 :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살릴 수 있지는 않을까? 전체적인 과정을 놓고 보았을 때, 현재의 손해는 결국 득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일이 잘 되어 가고 있을 때 : 혹시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오늘의 성과 중 위기의 싹이 될 만한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앞으로의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 것이며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내면의 지침 :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내가 가야할 궁극적인 방향은?


천재의 내면에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이러한 일련의 사고과정들을 천재가 아닌 우리들은 의식의 표면에서 계속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아우구스투스의 일생은 카이사르라는 천재적인 모델을 따라잡기 위한 피나는 노력의 과정들이 아니었을까. 그는 비록 타고난 천재는 아니었지만, 보고 싶지 않은 현실까지 직시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가 맨 먼저 직시한 현실은 자신은 카이사르와 같은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그 부족함을 메워줄 인재들을 곁에 두었다. 아그리파는 군사적인 면에서 마이케나스는 외교적인 면에서 그의 충실한 조력자가 되어 준 평생의 친구들이었다.


그가 직시한 두 번째의 현실은 현재 자신의 힘이 약하며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해 자제력을 발휘하고 기다릴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을 어리다고 얕보는 안토니우스의 방종을 참아내고 결국 그를 꺾고 로마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패권을 쥔 뒤에도 카이사르의 사례를 잊지 않고 제정으로 가는 길을 서두르지 않는 신중함을 보였다.


실제로는 제정이면서도 공화정처럼 보이게 원로원을 치밀하게 속인 것이다. 그렇게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세워 놓은 표지판을 따라 결코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 포석을 쌓아 나갔다. 제국의 경계선을 확정하고, 카이사르가 못다 이룬 제정의 체제를 완성했으며, 카이사르가 표방한 관용의 정신 아래 고대 지중해 세계에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를 뿌리내린 것이다. 천재가 아닌 자가 불굴의 의지와 지속적인 실천으로 마침내 천재조차 이루지 못한 목표에 도달한 것이다.


그릇의 크기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더군요."  "만나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그가 지휘하는 군단에서 백인대장이라도 시켜달라고 부탁했을 겁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알고 지내던 이탈리아의 한 경찰서장은 카이사르에 관한 전기를 읽고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구나 한번쯤 만나보고 싶은 인물. 그 밑에서 자신의 목숨을 맡기고 기꺼이 일할 만한 리더. 카이사르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한다.


카이사르 상권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공화정 말기 여러 인물들의 야심과 허영심의 크기를 장난스레 그려 놓았다. 작가에 따르면 허영심이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라면 야심은 남들의 평판과 상관없이 자신이 꼭 이루고 싶은 목표와 관련된 태도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야심과 허영심의 상관관계는 그 인물의 행동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카이사르의 경우 야심과 허영심이 남들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크다. 하지만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을 때, 카이사르는 야심을 택한다. 그리고 카이사르에 대적했던 폼페이우스, 키케로, 브루투스는 허영심이 야심보다 크다. 그보다 앞선 세대로 체제 내 개혁을 시도하기 위해 숱한 피바람을 몰고 왔던 술라는 허영심보다 야심이 훨씬 큰 경우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이러한 분류를 어떻게 봐야 할까. 실제 인물들의 성격 여부를 떠나서 이러한 관점은 인간 행동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도구가 되어줄 것 같다. 인간에겐 누구나 사회적 인정 욕구가 있고 이것이 충족되지 못했을 때, 인간은 고독해지고 불안해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 남들의 입맛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습이나 도덕 같은 것들도 결국 타인의 눈을 위한 것이 아닐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보통 우리들의 자연스런 선택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므로 결코 비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리더라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시오노 나나미의 기본적인 생각이 아닐까. 특히 개혁을 주도하는 리더라면, 다수의 저항을 받기 마련이다. 이때의 압박을 견뎌낼 수 있는 재능을 가리켜 시오노 나나미는 '야심'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 과정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개혁은 실패하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허영심조차 남 못지않았다. 아니 다른 누구보다도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강렬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야심을 택했다. 그것이 그가 오늘날 창조적 리더로 평가받는 이유가 아닐까. 로마인 이야기가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 창조에 필요한 것은 넘칠 정도의 고독이라고 시오노 나나미조차 푸념처럼 살짝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한계와 가능성


어쨌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5권이 모두 완결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나의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을 관통했다. 처음 한니발과 카이사르와 같은 영웅들의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에 빠져 있던 10대 후반, 내 관심은 취업을 고민하는 20대 후반에 접어들어 악명 높은 황제들인 티베리우스나 클라우디스처럼 세간의 악평을 받았지만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던 실질적인 업무자들에게 초점이 옮겨져 있었다. 세상은 화려한 스타들에게 주목하지만 정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사람들의 성실한 노력이 아닐까.


시오노 나나미의 책은 재미있고 그녀의 상상력은 신선하지만 그녀의 역사관과 인간본성에 대한 고찰에 기득권에 대한 옹호의 논리가 숨겨져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많다. 나 역시 그럴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녀가 묘사한 로마인들의 세계는 너무나 매혹적이다.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은 현재 살아 있는 우리 이웃들이며 무엇보다 바로 내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나의 젊음은 시오노 나나미가 그려 놓은 지중해 세계에서 사람들과 만나며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단련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들을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사랑만큼 맹목적인 것은 없다. 사랑의 본질은 종교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로마세계에 종언을 고하고 결국 새로운 유럽으로 이끌었듯이, 나의 이 로마인 이야기에 대한 사랑이 내 과거의 틀을 깨고 보다 새로운 지평으로 안내해 주길 바라마지 않는다.


다시 처음의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역사의 거인이지만 나는 평범하다. 천재가 아니었다고 이야기된 아우구스투스조차 나와 비교한다면 충분히 천재적이다. 내가 그들처럼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14권에 나오는 배교자 율리아누스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평가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 말을 끝으로 나의 감상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고양감은 젊은이에게 그때까지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일까지 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일개 철학도가 전쟁에서 이겨버렸다. 할 수 없다고 믿었던 일까지도 할 수 있다는 자각만큼 젊은이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고 자신감을 안겨주는 것은 없다. 고양이란 정신이 높아지는 것이다. 경험이 적은 젊은이에게는 특히 정신의 고양이 일어나기 쉽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일을 할 수 있고, 게다가 그것이 남들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사람은 이것이야말로 내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20대 후반의 율리아누스를 도취시킨 것은 책임감과 고양감의 칵테일이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상상한다." 이 기사는 사는 오마이뉴스와 도서출판 한길사가 공동으로 주최한 <로마인 이야기> 독후감 대회 응모작입니다.<편집자 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