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책(冊)

몽테뉴 수상록

물조아 2007. 6. 14. 08:55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 몽테뉴 / 이토

 

피땀 없이 누가 우승을 확신할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은 행복하게 죽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데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상세히 묘사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도 없으며 또 그만큼 유용한일도 없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존중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는 법을 아는 것이다.


그대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세상의 평판이 아니고 그대가 자신에게 내리는 평판이다. 그대 자신 속으로 물러서되 먼저 그대 자신을 영접할 준비를 하라. 그대 자신을 통제할 줄도 모르면서 그대 자신을 신뢰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책과 씨름하는 일은 다른 어떤 일에 못지않게 힘들고 가장 중시해야 할 건강의 최대의 적이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 얻어지는 즐거움에 기만당해서는 안 된다. 검소한 사람이나 구두쇠 쾌락주의자 야심적인 사람들을 망치는 것이 다름 아닌 책 읽는 즐거움인 것이다.


인간의 일이란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불확실하여 언제 어떻게 뒤바뀔지 모르므로 현재 행운이 자기에게 미소 짓고 있을 지라도 삶의 마지막 날이 오기 전까지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정은 정신적인 것이고 나누면 나눌수록 영혼을 맑게 해 주므로 욕구가 크면 클수록 즐거움도 커지며, 오로지 거듭되는 깊은 교류에 의해서만 가꿔져 풍성해지고 증가되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평가를 할 때는 신중해야 하고, 천하건 고상하건 간에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실제보다 낮춰 얘기하는 것은 겸손한 행동이 아니라 어리석은 행동이다. 자신이 지닌 원래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따르면 겁쟁이나 소심한 인간이 할 만한 짓이다.


진실은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을 실제보다 더 높여서 얘기하는 것은 항시 주제넘고 오만한 태도 때문이 아니라 어리석기 때문이다. 나쁜 일은 한다는 것은 비열한 짓이며 또한 그것처럼 하기 쉬운 짓도 없다.


아무런 위험도 없을 때 훌륭한 행동을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때 훌륭하게 행동하는 것은 오직 고결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확실히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데 비해, 남들은 매사에 확신과 자신을 가지고 임하는 것을 보고 나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 사람들은 늘 눈으로 보고 또 자기들 내부에도 있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상태에 대한 지식에 관해서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그들은 어떻게 해서 자기 자신이 움직이는 가를 모르고 있고


자기들이 잡고 조종하는 태업 장치를 우리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를 모를진대 그대는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나일강이 불고 주는 원인에 대해 설명하는 말을 내가 곧이곧대로 믿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아름다움이란 인간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요소이며 사람들 상호간에 호감을 주는 요소로서 제일이다. 아무리 거칠고 무뚝뚝한 사람이라도 어떤 식으로든 그 매력에 이끌리는 법이다.


우리는 정신을 따로 분리시켜서 별도로 존재하게 함으로써 육체를 경멸하고 육체를 저버리게 해서는 안 된다.


요켠대 우리는 정신으로 하여금 육체와 결합해서 그것의 배우자가 되게 함으로써 그 둘이 따로따로 놀거나 정반대로 작용하지 않고 서로 조화를 이루고 통일된 길을 걷도록 명령해야 한다.


불운이 약이 되는 경우도 있는 걸 보면 이렇게 타락한 시대에 태어난 것도 그다지 나쁘다고만 할 수 없는 모양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앞쪽을 보고 항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는 내 안을 들여다본다. 나는 나 자신 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검증하고 점검하고 맛본다.


나는 내 작품을 친구들이 청할 때 외에는 누구에게도 낭독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광장이고 목욕탕이고 가리지 않고 자기 작품을 큰소리로 낭독하곤 한다.


모범적인 가정생활이란 한 가정의 주인이 밖에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고, 법률에 저촉될까 두려워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집안에서도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다.


교육은 타고난 천성을 돋워주고 강화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천성을 바꾸거나 변화시킬 수는 없다.


우리 시대에 새로운 이념들을 동원해서 잘못된 사회 풍토를 개혁해 보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표면적인 악습들은 개혁하지만 본질적인 악폐는 그대로 방치하거나 오히려 늘리고 있다.


그리하여 그러한 악폐가 창궐하는 현상은 놀라울 정도를 넘어서 두려움을 줄 정도이다. 우리는 이러한 피상적이고 독단적인 개혁들 때문에 그 밖의 다른 참된 행위는 할 생각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 시대에 진실로 개탄을 금할 수 없는 풍조의 하나는 세속에서 벗어나려는 행위 자체가 부패와 추악함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혁에 의해 우리가 지닌 내적인 악, 보다 뿌리 깊고 본원적인 악들에 죄 갚음을 했다고 마음 편하게 믿어 버리곤 한다. 혹은 죄악을 오래 탐닉한 탓으로 죄의 추악함을 알아보지 못한다.  끝. '09.12.18  '11.6.16  2012.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