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햇빛 살인
그날 아침 한 염부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 죽은 그는 한반도에 살림터를 잡고 사는 7천만 명이 넘는 사람 중 어디에 어떻게 세워놔도 전혀 표가 나지 않을 한 사람의 중년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햇빛이 죽인 거지, 소금이 죽인 거지! 그래도 모르겠어요? 소금 만드는 양반들이, 참 뭘 모르네. 안 먹고 땀만 많이 흘리면 몸속의 소금기가 속속 빠져 달아나요. 이 양반, 몸속 염분이 부족해 실신해 쓰러졌던 거예요. 만들기만 하면 뭐해요. 자기 몸속의 소금은 챙기지도 못하면서!”
/ 아버지
어머니는 늘 아버지를 가리켜 ‘숙맥’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또 아버지를 “쑥”이라고 부르면서 “융통성이라곤 바늘귀만큼도 없는 사람!”이라고 토를 달았다. “맞아, 맞아!” “울 아빠, 쑥!” 그녀들은 박장대소 동의했다. 심지어 가끔 아버지를 부를 때 “쑥아빠!”라고 부르기도 했다.
매사에 그녀들은 당연히 어머니의 견해를 따르는 데 익숙했다. 집안의 작고 큰 일에 대한 결정권은 물론, 경제권도 절대적으로 어머니에게 있었다. 오랜 세월 그렇게 살아왔으므로 그녀들은 차츰 아버지에게는 무슨 일이든 상의하는 법도 없었고, 아버지 또한 불만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가족행사에서 아버지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빠지기는커녕, 행사를 도맡아 준비하고 뒷바라지해온 것이 바로 아버지였다. 가족들의 모든 축일에 대해, 모든 행사에 대해 아버지는 언제나 철저히 준비했고 알뜰한 선물, 깜짝 세리머니도 빠트리지 않았으며 조용하고 빈틈없이 그 뒤처리도 맡았다.
아주 충직한 시종이라 할 만 했다. “너희 아빠 같은 모범생 드물지, 드물고말고!” 칭찬처럼 들리진 않았으나 어머니 역시 그렇게 말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들은 늘 그 모든 축일에 어머니와 넷이서만 함께 있었던 것처럼 느꼈다. 일종의 그림자, 유령 같은 존재가 바로 아버지였다.
어머니는 늘 말했다. 세상은 무너지는 사람을 붙잡아주지 않는다는 게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무너지는 사람을 보면 더 밀어버리고 싶어 하는 것이 세상인심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설령 죽을 만큼 배가 고파도 뱃속 허기가 내는 비명 소리를 헛기침으로나마 단호히 감출 것이며, 외로워도 눈물 나도 사람들과 눈 마주치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어 단속해야 할 것이고, 화가 머리꼭대기를 뚫고 솟아도 오늘과 내일을 고려한 비즈니스 전략을 버려선 안 된다고 어머니는 가르쳤다.
아버지가 문제가 있다면 그런 것들을 능수능란하게 하지 못하는, 바로 그 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이상한 가족
개인의 고유한 꿈은 철저히 유폐시킨 채 오로지 복종하고, 일하고, 부조리한 사회구조에 철저히 빌붙어 지내지 않으면 그때의 젊은이들은, 주체적으로 살 수 없었다는 점에서 유랑민이나 다름없었다.
“너의 숨은 꿈은 버려라!” 그 세대라면 젊은 날 누구나 그런 명령을 받고 있었다. 주체를 버리면 시대의 요구만이 남았다. 정치적 독재의 어둔 터널을 지나오면 그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혹독한 자본의 독재 프로그램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들은 그때 알지 못했을 것이고 선명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 연인
요즘 뭐, 어머니의 희생은 많이 회자되지만, 아버지의 희생에 대해 말하는 것은 좀 촌티가 나는 걸로 여기는 사람도 많잖아.
“지금 생각하면요, 한 번도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만나게 된다면, 이 말만은 하고 싶어요. 아버지가 아버지이기 이전에, 선명우 씨로서...... 그냥 사람이었다는거...... 너무 늦게 알아차려 죄송하다고요.”
조선의 선비들은 개인의 영달이나 처자식 때문에 신념을 굽히게 될지도 모를 자신을 미리 경계하느라 곧고 담백한 배롱나무를 뜰에 심어 반면교사로 삼았다고 했다.
“요즘이야 뭐 이 나무처럼 살긴 어렵지.” “무슨 뜻이에요?” “아버지들 얘기야, 처자식이 딸리면 치사한 것도 견디고 필요에 따라 이념도 바꿔야지. 오늘의 아버지들, 예전에 비해 그 권세는 다 날아갔는데 그 의무는 하나도 덜어지지 않았거든. 어느 날 애비가 부당한 걸 견디지 못하고 직장을 박차고 나와 낚시질이나 하고 있어 봐. 이해하고 사랑할 자식들이 얼마나 있겠어? 감남권 초등학교에선 애들이 모여 앉아 제 애비가 죽으면 무엇 무엇을 물려받을지 셈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어. 효도가 비즈니스가 된 세상이야. 그러니 어떤 애비가 배롱나무처럼 살 수 있겠느냐고.”
/ 매운맛 빨대론
사람들은 핏줄, 핏줄이라고 말하면서 ‘핏줄’에서 감동받도록 교육되었다. 핏줄조차 이미 단맛의 빨대들로 맺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불렀다. 사랑이 빨대로 둔갑했지만 핏줄이기 때문에 그냥 사랑인줄만 알았다.
빨대들고 기웃거리는 젊은이들은 어디에서든 볼 수 있었다. 일차적인 표적은 아버지였다. 스물이 넘은 자식들조차 핏줄이므로 늙어가는 아비에게 빨대를 꽂아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모두 그 체제가 만든 덪이었다.
자본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소비 문명이 아이들과 그를 끝없이 이간질시켰다. 어떤 개인도 그것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낼 수는 없었다. 아비가 빨아 오는 단물이 넉넉하면 가정의 평화가 유지되고 그 단물이 막히면 가차 없이 해체되고 마는 가정을 그는 너무나 많이 보았다.
아버지가 실직하면 가족이니 더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해체였다. 그는 그래서 가끔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좀 더 적극적으로 아이들에게 개입했다면 달라졌을까, 저 거대한 문명에게 어떤 개인이 맞장 뜨는 게 과연 가능한 세상일까 하고.
/ 귀가
“사는 게 무섭지 않을까요?” “글쎄, 그게 언제부터 없어지냐고요?” “나이 먹어 절로 없어진 게 아니야. 공짜는 없어. 생산성이라는 사슬을 끊었기 때문에 얻은 축복이지. 외부로부터 부여받은 목표치를 걷어찼기 때문이라고! 시인이야 이런 거 알 필요 없겠지만.”
/ 작가의 말 / 생명을 살리는 소금을 꿈꾸며
《소금》은 가족의 이야기를 할 때 흔히 취할 수 있는 소설문법에서 비켜나 있다. 화해가 아니라 가족을 버리고 끝내 ‘가출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소금》이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자본의 폭력적인 구조가 그와 그의 가족 사이에서 근원적인 화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특정한 누구의 아야기가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온 ‘아버지1’, ‘아버지2’, 혹은 ‘아버지10’의 이야기다. 늙어가는 ‘아버지’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붙박이 유랑인’이었던 자신의 지난 삶에 자조의 심정을 가질는지 모른다.
이 거대한 소비 문명을 가로지르면서, 그 소비를 위한 과실을 야수적인 노동력으로 따 온 ‘아버지’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부랑하고 있는가. 그들은 지난 반세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아니 소비의 ‘단맛’을 허겁지겁 쫓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 늙어가는 아버지들의 돌아누운 굽은 등을 한번이라도 웅숭깊게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끝.
사진출처: 박범신 트위터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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