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책(冊)

집착을 버리면 행복이 보인다/일타스님 이야기 법문/

물조아 2010. 9. 2. 14:10

○ 집착을 버리면 행복이 보인다/일타스님 이야기 법문/일연학연구원 엮음/불교시대사

 

보시의장 베풀어 더욱 여유로운 생활

 

수행인은 난행고행(難行苦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난행고행이 성인을 만드는 길임을 명심하고 벼랑 끝에서 손을 놓아 버리는 난행고행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 난행고행은 자제의 능력에서 솟아납니다. 자기 스스로를 자제할 수 있는 힘은 전진하고 수행함으로써 길러집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 평생 모은 재산도 한 푼 가져갈 수 없으니~ 우리는 참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찾아나서야 합니다. ~ 우리가 남에게 베풀며 살아갈 수 있는 이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도 바로 무상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영원한 ‘나의 것’은 없습니다. 인연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떠나가는 것에 지나친 애착을 가지면 괴로움만 커질 뿐입니다. 오히려 돈이 나에게 찾아왔을 때 좋은 일을 많이하고 사랑의 인연이 맺어졌을 때 ‘너의 것’이 되어 서로를 살리고 더 좋은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지계의장 계를 지키는 청정한 생활

 

“저 사람은 때가 잔뜩 묻은 검은 천과 같다. 검은 천에는 먹물이 묻어도 표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희고 깨끗한 천위에는 아주 작은 점이 묻어도 표가 나는 법이다. 마치 맑은 거울에서는 티끌 하나만 묻어도 환하게 드러나듯이 말이다.

 

그러니 마음이 검게 물든 사람에게 꾸짖은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너는 마음이 청정한 불자가 아니냐. 너의 마음이 깨끗하므로 티끌만한 허물이 있어도 태산 같이 드러나 보이는구나. 그래서 너를 꾸짖는 것이다.”

 

사람에게 지혜가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 눈이 밝은 사람은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분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이 밝다 하더라도 가야 할 곳을 찾아가지 않는다면 이 또한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 지혜가 있다하여 실천에 소홀해서는 안 되며, 지혜가 없이 열심히 닦기만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붓다(부처)와 뭇다(중생)의 차이입니다. 지혜로운 사람, 한 가지 기술에 능통한 사람을 붓다라 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나 기술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을 뭇다라고 합니다.

 

‘스스로(自)’를 돌아보고 살펴서 깨치라는 말씀입니다. 결코 진리는 자기를 떠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아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수행해야 합니다. 내가 밝힌 등불이 나의 앞길을 밝혀 주듯이 나 스스로를 경책하고 반성할 때만이 길이 나타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외도나 악인 또는 삿된 소견에 빠져 버린 이단에게는 불법을 말해 주거나 계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부처님의 경을 특히 계법을 가르치는 것은 도둑에게 집 열쇠를 맡기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 기다려라, 옷이 떨어지기 전에 미리 기울 필요는 없느니라. 옷이 떨어지고 해졌을 때 바늘과 실로 깁듯이 계행이 필요할 때 너희들에게 말해 주리라.”

 

인용의장 참고 화합하는 생활

 

“일체 중생이 다 부처님인데 어찌 높임말을 쓰지 않겠는가.”  대중 속에 부처가 있다! 항상 부드럽고(柔), 화합하고(和), 선하고(善), 순수한(順)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 유화선순(柔和善順)보다 더 큰 힘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강한 것이라 해도 부드러운 것을 이기지 못하고, 투쟁은 화합을 넘어서지 못하며, 이기심은 선한 마음을, 약삭빠름은 순수함을 따라 잡지 못합니다.

 

시비를 떠나라! ‘내가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만 하면 그것으로 끝날 일인데 서로 고집을 부리고 아만을 내세우기 때문에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 한 순간만 잘 넘겨보십시오. 시비는 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시시비비를 떠나 버린 한가로운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옳다, 그르다 따지는 것, 이 한 생각 이것이 곧 생사(生死)입니다. 생사가 없는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불자가 옳고 그름을 따지며 생사 속을 헤매서야 되겠습니까?

 

되돌려 받은 욕! 나를 욕하는 소리가 좋게 들릴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욕하는 소리에 마음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을 쓰게 되면 결국 자신의 마음이 상하게 되고 어지러워질 뿐입니다. 상대방이 해대는 욕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욕은 언제나 입 밖으로 낸 사람의 몫이 됩니다.

 

닦지 않고 배우지 않으면 결국은 자기만 손해 볼 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배우지 않으면 결국은 자기만 손해 볼 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깨우쳐 가지 않으면 누구도 자기를 구제해 주지 않습니다. 배움의 비결은 제 마음을 여는 데 있습니다.

 

“나는 죽음을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으면 그뿐! 어찌 죽고 사는 데 마음을 두리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을 사바세계라 하는데 인도말‘사바’는 감인 또는 잡회로 번역됩니다.

 

감인은 ‘견디고 참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 세상은 참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곳임을 말한 것입니다. ‘잡회’란 온갖 잡된 것들이 얽히고 설킨 것으로 시시비비 끊이질 않는 것이 이세상임을 나타낸 말입니다.

 

많이 얻어 쓰면 쓰는 만큼 ‘나’의 도에는 손해가 됩니다. 가져다주는 사람은 복을 짓게 되지만 ‘나’는 그만큼 빚을 지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빚을 지지 말아야지 무엇하러 자꾸 빚을 집니까? 닦은 도로써 빚 갚기에 바쁘다면 ‘나’의 도는 언제 이우러집니까?

 

선정의장 성불을 향하여 나아가는 생활

 

인간의 한평생은 너무나 짧은 것입니다. 잠깐 사이에 백년 이라는 세월이 지나가 버립니다. 죽고 난 뒤에 가지고 갈 것도 아닌 물질데리고 가지도 못할 사람 때문에 한평생 고민할 것이 무엇입니까? 어찌 마음 닦는 공부를 하지 않고 한가히 놀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 바로 공문입니다. 큰 사찰에 들어갈때는 먼저 문짝을 달지 않은 일주문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짝이 달려 있지 않기 때문에 일주문은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습니다.

 

지혜의장 자기를 돌아보는 생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절대적인 존재는 바로 ‘나’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도 바로 ‘나’입니다. 어떠한 존재에 대한 사랑도 ‘나’를 절대의 자리에 둔 다음에 서열을 정하게 마련입니다. 배우자도, 자식도, 부모도, 부처님도 ‘나’ 자기 자신이 있은 다음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천상천하에서 오직 ‘내’가 가장 존귀하고 높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높고 존귀한 ‘나’를 찾기 위해 부처님은 출가 수행하셨고 마침내 그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참으로 ‘나’를 사랑하게 되면 일체 중생을 나와 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상을 불교에서는 ‘대자대비’라고 합니다.

 

중도를 따르라! “잘 들어라, 공부도 그와 마찬가지다. 너처럼 억지로 애를 쓰며 공부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발바닥이 터지고 몸이 피로해져서 쓸데없는 생각이 더해질 뿐이다. 마치 거문고 줄을 고르는 것과 같이 공부하되 너무 팽팽하게 해서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하게 해서도 안 되느니라. 모든 신묘한 법이 그 가운데 있으니 잘 명심하여라.”

 

비워야 담을 수 있다! 모름지기 법문을 들을 때는 빈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빈그릇에는 능히 담을 수 있지만 그릇이 차 있으면 아무리 좋은 자비법문, 오도법문이라 할지라도 담을 수가 없습니다.

 

독사가 물을 마시면 독을 이루고,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을 이룬다. 지혜롭게 배우면 보리(깨달음)를 이루고 어리석게 배우면 생사(生死)를 이룬다.

 

향 피운 방에 들어가면 향내가 몸에 스며들고, 변소에 앉았다 나오면 구린내가 몸에 스며들게 마련입니다. 주위 환경이나 분위기는 사람을 그 속으로 젖어들게 하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자경문》 “몸을 정중히 가지면 산란함이 쉬어져 선정을 이루게 되고,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을 돌려 지혜를 이룬다. ~ 입은 재화의 근본이니 반드시 엄숙하게 지켜야 하고, 몸은 재앙의 근본이니 가벼이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옛글에 ‘쓸데없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한번 사람의 귀에 들어가면 힘이 있어도 뽑아내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마치 밑이 동그란 항아리와 같습니다. 너무나 동그랗기 때문에 바람만 불어도 항아리는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항아리 속에는 구정물이 들어 있습니다. 번뇌 망상이라는 구정물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항아리가 움직이지 않아야 할 텐데 끊임없이 움직이니 구정물 찌꺼기가 언제나 부옇게 떠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생명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무상하고 헛된 몸뚱이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몸뚱이는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몸뚱이는 마치 자동차와 같습니다. 자동차는 주인이 운전하는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운전수가 없으면 단지 고철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자동차와 같은 이 몸뚱이가 어찌 주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진짜 주인은 우리의 몸뚱이를 운전하는 마음입니다.  끝.

 

사진출처: 나를 찾는 불공/울시 cafe.naver.com/bgong/8541  '12.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