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책(冊)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 / 유안진 대표 에세이

물조아 2010. 6. 7. 00:44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 / 유안진 대표 에세이 / (주)현대문학 ‘88.3

 

머리말 / 만남을 위하여, 아직 만나본적 없는 독자 그대여, ~ 그대의 마음과 만나고 싶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진솔한 마음으로 만나기 위하여, 저는 여기 제 마음을 먼저 보여드리는지도 모릅니다.

 

총명한 여성은 운명을 믿지 않으며, 더구나 기적이나 신화를 믿지 않습니다. 운명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이며, 기적과 신화 역시 자신의 땀방울이 강물을 이룰 적에 창조되는 자기인생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넓이 뛰기를 할 때는 뒤로 돌아서 몇 발자국 물러서지 않으면 더 멀리 뛸 수가 없습니다.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메뚜기는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살이는 “얘, 메뚜기야, 내일이 뭐니?” 하고 물었습니다. 메뚜기는 내일이란 캄캄한 밤이 지나면 다시 오늘같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것이 내일이라고 일어주었으나 하루살이는 이해할 수 가 없었습니다.

 

메뚜기와 개구리가 놀았습니다. 개구리는 메뚜기에게 “얘, 그만 놀자, 날씨가 추워지니 내년에나 만나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메뚜기는 내년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개구리가 아무리 내년을 설명해도 메뚜기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이 오고 얼음이 얼고, 다시 봄이 온다고 말했으나 메뚜기는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살이가 밤이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밤은 있습니다. 그리고 메뚜기가 겨울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겨울은 있습니다. 다만 하루살이는 밤을 이해하지 못하고, 메뚜기는 겨울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틀림없이 겨울은 존재합니다.

 

숨 막히는 폭염과 싸우며 스스로 좁은 문을 택한 수험생들, 그대들은 반드시 땀 흘린 만큼의 결과를 얻을 것이며, 그 결과가 어떠하든 최선을 다했다면 그대들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운 사람들, 멀리 있어도 소식이 없어도 가장 조용한 마음자리, 밝은 가을 달빛 어리고 맑은 바람이 쓸고 간 자리에서 흔들리며 조용히 떠오르는 이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새삼 감사의 깊은 눈길을 보낸다.

 

지란지교를 꿈꾸며,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壽衣)을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그는 인생이 짧다하여 성급한 단거리선수가 되지 않으며,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좋아하는 일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렇다 그 누구도 잘못 살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 겨울 추위 같은 아픈 매를 스스로 때림으로써 아픔과 기쁨의 가치를 깨닫기 위하여 옳은 길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일 년 중 가장 우울할 때가 송년에 즈음한 때이리라, 왠지 너무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 것 같고, 자신이 더없이 초라해 보이고, 한 일 없이 일 년이 다 가는 휑한 거리 찬바람에 밀려 얼음길을 걷노라면 고독이나 허무는 가벼운 표현이며, 삶이 이다지도 가혹하고 잔인한가 새삼 깊이 실망도 하리라.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그런 하나를 위해 열의 유혹을 버릴 용기이다.

 

무엇이나 열심히 하는 것은 모두가 나에게 값진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소위 반평생이란 세월을 살고 나서 나의 열심은 〈설니홍조의 기러기〉처럼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는 눈이 떠진 것을. ~ 관찰의 목적 없이 열심스런 관찰만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진실로 내가 바라고 추구하는 목적과 무관한 일에 시간과 노력을 바치면서 바쁘게 성실히 산다고 믿어왔다. ~ 열심스럽다거나 성실하다는 말은 값지고 의미 있는 노력일 때 제 값을 지닌 말이지, 무조건 좋은 뜻을 가진 말은 아니지 않은가?

 

슬픔이나 고독은 감정의 사치가 아니다. 슬퍼해야 할 일에 마땅히 슬퍼할 줄 알고 고독할 때 고독할 수 있다는 것은 진실로 사람다움이며 양심에 순종하는 갸륵함일 게다. 〈비누는 몸을 씻어주고 눈물은 마음을 씻어준다.〉는 유태의 격언

 

단 한번 마주친 시선으로 단테는 평생토록 베아트리체를 사모하여 그의 문학에서 구원의 여신이 되었고, ~

 

작은 일에 성실하며 욕심 없이 살다가 조용히 죽어서 풀섶에 피는 들국화로 환생되고 싶다. ~ 장례식에 갈 때마다 나는 죽음도 삶의 한부분이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죽는 다는 것은 끝이 아니며,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 믿고 싶다.

 

지금 우리가 아는 삶보다 훨씬 고귀한 삶을, 알 듯 모를 듯 감지할 수도 있을 그런 진지한 삶을 다시 이어 사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학창 때 나는 슘피터의 기업가정신에 매료된 적이 있다. 〈첫째로, 나는 나나름의 왕국, 나나름의 왕조를 건설할 꿈과 의지가 있다. ~ 그 다음으로, 나에게는 정복하려는 의지, 다시 말하면 나 자신을 타인보다 나은 존재로 만들며, 성공의 열매가 아니라 성공 그 자체를 위하여 싸우고 노력하려는 충동이 있다. ~ 마지막으로, 나에게는 창조하는 즐거움, 일을 끝내는 즐거움, 단순히 나 자신의 정력과 독창성을 행사하는 즐거움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남성, 그대는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끼여 사는 남성이리라. 어머니는 나를 낳아준 분이요, 더욱이 우리나라의 어머니는 남다른 광적인 애정과 되돌려 받으려는 효에 기대를 걸고 헌신을 아끼지 않으며 아들을 키워오신 분이다. 아내로 말하면, 오로지 남편 한 사람만 바라보고 희망을 걸고 낯설고 습관과 풍속이 다른 집안에 들어온 약자의 처지, 마음 터놓고 말 한마디 할 사람이라곤 남편 밖에 없다.

 

어머니를 따르는 것은 인륜의 도리요, 아내를 따르는 것은 자연발생적 본능, 상반된 이 두 길에서 남편이며 아들인 그대는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 것인가. 그대는 한 여인의 남편으로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한 여인의 아들로 태어났음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러나 그대는 한 여인의 아들로 죽지 않고 한 여인의 남편으로 살다가 죽을 것도 잊어서는 또한 안 된다.

 

언제나 공명정대한 중립을 고수하되, 뚜렷하고 흔들리지 않는 굳은 줏대를 보여야 한다. 며느리 흉을 보는 어머니의 말씀은 듣자마자 곧 잊어버리고, 시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내의 말도 귀담아 듣지 말거나 흘려버릴 일이다.

 

자신에 대하여 지켜야 할 예의, 자기에 대한 자신의 예의란 결국 자기를 정확히 알고, 자기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자기내부의 적들과 싸워 이겨서, 자신의 의지를 자기의 뜻대로 좌우할 수 있는 자기의 주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며, 이것은 그 자신에 대한 예의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오늘 있다가 내일은 사라져버릴지라도 살아 있는 한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것이 떳떳한 자세일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가족을 사랑할 수 없고, 가족을 사랑하고 가정이라는 가장 작은 사회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자기의 직장사회와 직장의 일을 사랑하고 충성할 수 없다. 하물며, 국가사회나 인류를 어찌 사랑하며 우애를 나누어줄 수 있으랴. '10.12.24  '12.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