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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남긴 공은 ‘할 수 있다’…보수진영, 다 가지려 해선 안돼”

물조아 2009. 10. 23. 11:39

[경향신문] 손제민기자 ㆍ‘박정희 연구’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59·정치학)는 박정희 연구자다. 유신 시절이던 1974년 한국이 싫어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한때는 한국말조차 하지 않고 살려고 했지만 30여년이 지난 지금 박정희의 긍정적인 면을 보려 한다. 그는 어떻게 박정희 시대와 화해할 수 있었을까.


박정희 전 대통령 30주기를 맞아 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김 교수는 21일 인터뷰에서 현 정부 들어 더욱 심각해진 한국사회의 분열에 대한 걱정부터 털어놨다. “이명박 정부 들어오며 이유야 어찌됐든 일국의 대통령이 자살할 정도로 한국사회는 많이 갈라져 있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두 지도자가 사라지면서, 게임은 너무 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보수가 다 가지려고 하면 안됩니다. 반대 진영이 움직일 공간조차 보장하지 않으면 그것은 다 같이 다치는 길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은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정희의 과가 많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식민지시기와 전쟁을 거치며 ‘짚신’ ‘엽전’이라며 열패감에 젖어있던 한국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시켜 준 계기가 박정희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한국인들의 심성에 없지 않았지만, 그것을 발견하고 현실에서 힘을 갖게 한 계기가 박 전 대통령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박정희 이전 지식인들의 역할을 거론했다. 그에 따르면 4·19에서 5·16에 이르는 11개월간의 잡지 사상계는 함석헌, 장준하, 한태연, 이만갑 등 지식인들이 두려움 없이 쏟아냈던 새 국가 건설상을 담은 글들의 각축장이었다.


김 교수가 연구 과정에서 만난 쿠데타 주역들은 박정희 소장 휘하 젊은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영문 서적을 읽을 능력이 되지 않아 사상계를 탐독하며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박정희 본인은 사상계의 몇몇 구절을 줄줄 외웠다”고 한다.


쿠데타 세력이 사상계에서 얻은 결론은 “강력한 지도자의 필요성과 국민성 개조”였다. 그러한 아이디어는 박 전 대통령에 의해 새마을 운동과 중화학 공업 육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미국이 지원하는 주변 정세와 맞물려 산업화와 고도 성장을 가져왔다.


그는 ‘할 수 있다’ 정신이 산업화뿐만 아니라 민주화로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할 수 있다’가 유신체제가 들어서며 ‘안되면 되게 해’로 바뀌며 국가 권력이 도덕성을 상실했고, 애초의 ‘할 수 있다’가 가진 도덕성은 민주화 세력으로 넘어갔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죽을 각오로 독재 체제와 경쟁했습니다. 공장에 들어가서 노조를 조직한 대학생들 중 근면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 교수의 관심은 지난해 여름 한국사회를 달궜던 ‘촛불 민주주의’와 ‘참여 민주주의’로 이어진다. “박정희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 단계들을 거쳐오며 국민들이 확실히 진보·보수 모두에게 보여준 것이 있습니다. ‘지식인, 정치인들아, 너희들 우리 말 듣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죠.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했을 때 국민들이 그 다음에 투표로 결단을 냈습니다. 노무현 쪽에 몰표를 줬던 국민들이 1년 뒤에는 어차피 다 도둑놈이라면 돈이나 잘 벌 것 같은 도둑놈을 뽑아줬고요.”


그는 지금 “참여 민주주의의 전형”으로서 노무현 전 대통령 연구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박정희와 노무현은 모두 소탈한 지도자였다고 이야기되지만, 박정희의 권위는 ‘침묵’에서 나왔고, 노무현의 탈권위는 ‘말’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상반돼 보입니다. 두 개인의 차이이기도 하고, 시대의 변화이기도 하고. 분명히 봐야 할 것은 노무현 사후 우중에도 불구하고 500만명의 인파가 ‘당신이 있어 행복했다’며 조문한 것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김 교수가 말하려던 것은 결국 보통의 한국인들이 아닐까 싶다.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