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서울 강남 지역에 사는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앞으로 입학사정관제가 대학입시에서 중요한 관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자 강남에 신종 과외가 생겼다는 것이다. 전문강사의 지도 아래 초등학생 때부터 ‘독서일기’라는 것을 쓰게 한단다. 초등학교 고학년에게는 영어를 가르치면서 매일 ‘영어일기’도 쓰도록 한다고 했다. 고교 진학 후, 또는 대입 직전에 벼락치기로 만든 경력이 아니고 어린 시절부터 착실히 내공을 다져왔다는 ‘증거물’ 앞에서 제아무리 까다로운 입학사정관도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는 계산에서란다. 이야기를 듣고 잠깐 소름이 끼쳤다.
지난 5년간의 대입 수능시험 성적이 일부나마 유형별로 공개되고 있다. ‘판도라의 상자’가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 셈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전국 시·군·구별 수능성적 1, 2등급 분석 자료에선 누구나 짐작하던 사실이 새삼 수치로 확인됐다. 강남과 외고·과학고·자립형사립고가 있는 지역이 그렇지 않은 지역보다 성적이 훨씬 높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부모 세대의 부(富)와 학력이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다. 미국의 집값은 그 지역 학교의 성적 수준에 크게 영향받는다. 일본 도쿄대는 2005년에 고교 3학년이던 학생 4000명을 선정해 3년간 진로를 추적 조사했다. 학생 부모의 연간 소득을 200만 엔 미만에서 1200만 엔 이상까지 7단계로 나누어 대학 진학률과 비교했다. 소득과 4년제 대학 진학률이 정비례했다. 200만 엔 미만 소득의 4년제 진학률은 28.2%, 1200만 엔 이상은 62.8%였다. 고교생뿐이 아니었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한 대학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초등학교 6학년생의 국어·수학 성적도 부모의 소득 규모에 비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아사히신문 7월 31일, 8월 5일자).
높은 소득과 학력 수준을 갖춘 부모가 자식 교육에 열성을 다하는 것을 나무랄 까닭이 없다. 또 성적이 돈 하나에만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타고난 머리도 중요한 요인이고, 선생님의 열의나 본인의 의지에도 크게 영향받는다. 가난한 부모가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자식에게 강력한 성취동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한 가지 요인이 과하게 작용해 다른 요인을 압도해 버린다면 이는 장차 사회문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통계청·한국은행이 올 2분기 학원비 통계를 분석한 결과 소득수준 상위 20% 계층이 쓴 학원비가 하위 20% 계층 학원비의 7.6배에 달했다. 통계를 내기 시작한 2003년 이래 가장 큰 격차라고 한다. 어두운 조짐이다.
나는 학생에게 성적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아직까지는 학교성적이 이후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데 너무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 학력(學歷)과 소득의 상관관계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지나치게 밀접하다. 머리도 있고 성취동기도 높은데 단지 경제적 요인 때문에 성적을 올리지 못하는 학생이 늘어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회 상층부가 일종의 ‘불공정 경쟁’으로 승리한 사람들로 채워졌다고 여겨질 때 마음 속으로 승복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따라서 이는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사회문제요, 경우에 따라 안보 문제로 번질 수도 있다.
수능성적 공개 수준을 둘러싼 논란이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나는 성적을 더 많이, 아예 까발리다시피 공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성적 공개가 아니라 공개된 성적을 제대로 활용하고 대책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공개 기피는 ‘귀 막고 방울 도둑질(掩耳盜鈴)’ 하는 격이다. 특히 학생 성적과 부모의 소득·학력 간의 관계를 보다 정밀하고 광범위하게 연구해 강력하고 다양한 정책 수단들을 개선책에 반영해야 한다. 이미 있는 격차가 손으로 가린다고 없어지는가. 교육 관련 정보를 계속 쉬쉬하며 감추고 덮어두다가는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희망’까지 썩어 문드러질 수 있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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