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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영어 30년, 민병철이 본 한국영어

물조아 2009. 6. 18. 06:17

[주간조선] 최혜원 기자 사진=이경호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조기유학? 연수? 돈과 자식 다 잃는 길 학원·원어민 교사 널렸는데 왜 보내나,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60호에 게재되었습니다.>


기사를 쓰기 위해 민병철(59)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를 세 번 만났다. 한 번은 6월 1일 서울 서초동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진행된 정식 인터뷰 자리, 한 번은 이튿날 중앙대 중앙문화예술관 10704호에서 열린 신문방송학과 1학년 ‘실용영어’ 수업현장에서였다. 마지막 만남은 6월 9일 중앙대 중앙문화예술관 대강당에서 그가 마련한 방송인 김제동씨의 ‘글로벌 리더십 특강’에서 이뤄졌다.


한 인물을 인터뷰하기 위해 세 차례나 시간을 내는 건 인터뷰어에게도, 인터뷰이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인터뷰 당하는 입장에선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민 교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만남을 자청했다. 자신이 하는 말 외에 자신이 맡고 있는 강의, 자신이 초대한 강사의 얘기까지 꼭 들어줬으면 했다. 인터뷰 당일엔 “전날 밤을 꼬박 새워 만들었다”며 꼼꼼하게 검토한 흔적이 역력한 참고 자료를 건넸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군데군데 필요한 부분은 자신의 노트북에서 관련 파일을 꺼내 보여주며 부연했다.


‘민병철’이란 인물의 행보는 꽤나 독특하다. 그는 실용영어의 대명사 격인 ‘민병철 생활영어’란 브랜드를 30년간 이어온 사업가인 동시에 모교인 중앙대에서 학생을 지도하는 교육자다. 또한 2년 전부턴 ‘선플달기 국민운동본부’란 단체를 만들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악플 문화를 뿌리 뽑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는 시민운동가이기도 하다. 장소를 바꿔가며 대여섯 시간에 걸쳐 이뤄진 인터뷰를 통해 그가 쏟아낸 얘기들은 그래서 하나같이 흥미로웠다. 대한민국 영어교육에 대한 쓴소리에서부터 자기 돈을 써가며 선플운동에 매달리는 철학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이어진 인터뷰 현장을 지면에 공개한다.


30년 장수 ‘민병철 생활영어’


‘민병철 생활영어’가 올해로 30년이 됐다고요. “(낡은 책을 한 권 꺼내며) 너무 오래돼서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이게 민병철 생활영어의 효시가 된 책이에요. 초판이 나온 해가 1975년이었죠. 이 책으로 남산 KBS 시절 라디오에서 생활영어 방송을 했어요. 그러다 1978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정식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완성된 책을 교재로 1979년부터 MBC 라디오방송을 시작했고요. 방송이 인기를 끌며 책도 덩달아 주목을 받게 됐어요. 그게 벌써 30년 전 일이네요.”


언제 처음으로 영어와 인연을 맺게 됐나요. “어릴 때 서울 연희동에 있는 한 교회에 다녔어요. 호주 선교사가 있는 곳이었죠.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살았는데 종교에 빠져서가 아니라 선교사가 만들어주는 스파게티가 너무 맛있어서였어요.(웃음) 한창 배고플 때였으니까요. 그 선교사에게 아들이 둘, 딸이 하나 있었어요. 열 살, 열한 살, 열두 살로 모두 제 또래였죠. 주말마다 그 친구들과 만나 대화하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어가 늘었어요.”


단순히 ‘영어 좀 하는’ 것만으로 방송 진출하긴 쉽지 않았을 텐데요. “희소성 때문이었을 겁니다. 당시만 해도 영어를 실용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거든요. 대학 때 아르바이트 삼아 영화로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삼손과 데릴라’ ‘벤허’ 같은 영화가 상영될 때 대한극장에 가서 영사기 다루는 분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사를 전부 녹음했어요. 그걸 갖고 학생들을 상대로 과외를 했죠. 입소문이 나면서 KBS 라디오방송 관계자에게까지 알려졌어요. 대학 3학년 때부터 20분짜리 아침방송에 투입됐죠.”


‘민병철 생활영어’를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대학 졸업 후 미국시카고로 유학을 갔습니다. 대학원에 다니며 남는 시간을 이용해 시카고 인근 트루먼칼리지란 시립학교에서 외국 이민자를 위한 영어교육 강사로 일했어요.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프로그램이 제법 활성화돼 있었거든요. 무료 강습이었지만 전 대학 측으로부터 강의료를 받았으니 당시로선 그게 제 직업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일본·중국·베트남·스페인 등 각국 이민자를 상대로 강의를 하다보니 외국인 입장에서 영어를 익힐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실용구문 위주 학습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부터 책 집필을 계획했어요.”


당시 미국에 이민 간 한국인의 위상은 어땠나요. “미국에 머물며 느꼈던 가장 큰 아쉬움은 뛰어난 역량을 갖추고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한국인이 너무 많다는 거였어요. 한국에서 아무리 훌륭한 직업을 갖고 있던 사람도 미국에 오면 할 일이 없어 죄다 세탁소나 슈퍼마켓, 봉제공장 같은 곳으로 흘러들어갔거든요. 가장 큰 문제가 영어였어요. 기본적인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요. 영어로 말이 안 통한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발산조차 못하고 푸대접 받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할 일이 뭘까 고민했고 그 결과가 ‘민병철 생활영어’였던 셈이죠.”


아무래도 사람들은 민병철 하면 ‘MBC 생활영어’ 당시 모습을 많이 기억합니다. “MBC 방송을 하게 된 계기도 미국에 있을 때였어요. 1978년 미국에서 교민들을 모아 한국문화원이란 걸 만들었거든요. 한국인의 우수성을 알리고 한국 고유의 문화를 소개하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한국 문화의 날’을 정했어요. 수백 명의 교민들이 모여 태권도 시범과 부채춤 공연을 준비하고 각자 음식을 준비해 와서 즐겼죠. 영어 사회는 제가 맡았고요. 평이 좋아 시카고시청에서 똑같은 행사를 한 번 더 했는데 그때 행사장에 온 MBC 기자 한 분을 만나게 됐어요. 제 진행 실력을 보시더니 나중에 한국 오면 MBC에 꼭 한 번 꼭 들르라고 하시더군요. 그게 계기가 돼 MBC에 진출하게 됐어요.”


처음부터 TV에 데뷔했나요. “1979년 첫 방송을 했는데 그땐 라디오였어요. 당시만 해도 제가 미국과 한국을 오갈 때여서 한 번 내한할 때마다 15분짜리 방송 2~3개월치를 녹음하고 들어가곤 했죠. 그렇게 2년을 방송했는데 한 번도 펑크를 낸 적이 없었어요. 그때 MBC에서 절 괜찮게 평가했는지 TV 방송 한번 해보겠냐고 제안하더군요. 그게 1981년이었어요. 첫 방송 땐 어찌나 떨리던지 TV 스크립트를 쓴 후 달달 외우다시피했어요. 그렇게 시작한 게 훌쩍 10년이 흘러버렸죠.”


생활영어를 주제로 한 최초의 TV방송이었던 만큼 에피소드도 많았겠어요. “당초 책을 쓰게 된 것도 미국에서 현지 교민들이 ‘이럴 땐 영어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물어온 내용들을 정리하면서부터였어요. 미국에서 통용되는 영어를 방송에서 바로 사용했으니 항의전화가 빗발쳤죠. ‘I want to go’가 맞는데 왜 ‘I wanna go’라고 하느냐 같은 불만이었어요. 교사 중엔 방송국에 전화해 ‘민병철 영어는 너무 구어체라서 방송에 적합하지 않다’라며 따지는 분도 있었어요. 녹화장이고 집이고 무작정 찾아와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성분도 있었고요. 함께 방송하던 외국인 파트너는 십수 명쯤 바뀐 것 같아요.”


책과 방송으로 한국에 생활영어를 처음 보급했다는 데 대한 자부심이 대단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인구를 4000만명으로 잡으면 제 책이 한 가정에 한 권씩은 비치돼 있을 거예요. 아버님이 보고 계십니다, 무역회사 다니는데 해외 출장 갈 때 잘 활용했습니다, 같은 말을 들으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어요. 총 5권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간 수차례 개정 작업을 거쳤어요. 판형도 여러 번 바뀌었고요.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미국 현지에서 비디오 촬영 등 추가 작업을 한 것도 셀 수 없이 많으니까요.”


한국인 영어 실력의 현주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의 영어 실력은 어느 정돕니까. “제가 대학에서 실용영어를 가르치고 있어요. 요즘 대학에서 가르치는 생활영어는 미국으로 치면 초등학교 수준입니다. 밥 먹었냐, 주말엔 뭐했냐, 가족은 어떠냐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지금 대학생에게 필요한 건 기초 회화가 아니에요. 자기 분야를 좀 더 전문화해 세계의 전문가들과 거리낌 없이 특정 주제를 놓고 난상토론을 펼칠 수 있을 정도의 영어 실력을 갖춰야죠. 아직까지 대학에서 기초회화를 가르치고, 대학생이 돼도 외국인 만나면 겁먹고 꽁무니 빼는 현실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어요.”


우리나라도 영어교육에 쏟아붓는 열정과 노력은 만만찮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전 한국인이 영어를 못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영어를 잘할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되지 않았을 뿐이죠. 핀란드의 예를 들어볼까요. 핀란드는 공식어가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민의 75% 이상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합니다. 핀란드 초등학교에선 영어수업이 주2회씩 배정됩니다. TV 외화도 50% 이상은 영어자막을 의무적으로 편성하도록 해놨죠. 거기에 비하면 한국인은 영어를 배운 적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중·고교 6년간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수업은 총 708시간이거든요. 날짜로 환산하면 29.5일이에요. 채 한 달이 안 되는 거죠. 그걸 갖고 영어를 배웠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전 아니라고 봐요.”


물리적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게 꼭 능사일까요. “이렇게 예를 들어보죠. 박태환 선수는 지금의 명성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영 연습을 했을까요. 김연아 선수가 완벽한 공중 점프 연기를 선보이기 위해 찧은 엉덩방아는 몇 번이나 될까요. 박지성 선수는 슈팅 하나를 성공시키기 위해 30만회나 킥을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영어는 그냥 대충 하면 된다고요? 전 동의할 수 없어요. 영어도 기본은 시간 투자예요. 중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10년간 영어를 배웠다지만 문법이나 독해만 파고들었지 대화체 영어 공부를 언제 제대로 해봤습니까.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외국어 교육은 목표 언어(target language)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국민은 제대로 된 영어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어요.”


현행 영어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몇몇 부모는 자녀의 조기유학을 결심합니다. “제 주위에도 자녀를 조기유학 보낸 부모가 많아요. 전 자녀가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일 때 영어학습을 위해 외국에 보내는 건 정말 잘못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어, 물론 잘하겠죠. 그런데 부모와 대화가 안 됩니다. 완전히 미국 사람, 캐나다 사람 다 된 거예요. 영어는 잘하지만 외국인이 돼버려 내 자식 같지 않은 것과 영어 좀 못해도 확실한 내 자식인 것, 어떤 게 나을까요? 굳이 어린 자녀를 조기유학의 길로 내몰지 않아도 우리나라는 영어교육 관련 인프라가 꽤 탄탄한 편입니다. 인터넷에 공짜 영어 콘텐츠 널려 있죠, 방송 채널 많죠, 원어민 강사 충분하죠, 영어학원 차고 넘치죠.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영어를 배울 수 있는 환경이에요. 단지 부모들이 자기 어릴 적만 생각해 외국에 가야만 영어를 잘할 수 있다고 믿는 거죠.”


그래도 영어권 국가에서 배우는 게 국내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전적으로 학습자 본인과 부모의 의지 문젭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그래요. 유학 한 번 보내려면 항공료와 학원비, 현지 생활비 등 돈이 얼마나 많이 듭니까. 국내에서 공부하면 비용을 훨씬 절약할 수 있어요. 이미 미국학교 프로그램을 그대로 들여와 운용하는 곳도 있죠. 그뿐인가요. 국제학교도 있고 대안학교도 있죠. 전 자녀의 조기유학을 고민하는 학부모가 있으면 무조건 충고합니다. 그 돈 있으면 우리나라에서 자녀 지켜보고 사랑해주면서 영어교육 시키라고요.”


영어를 잘하기 위한 단 하나의 비결이 있다면요. “잘 외우는 겁니다. 제가 이런 얘길 하면 꼭 반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영어는 이해하는 거지 외우는 게 아니지 않냐고 하죠. 뭘 모르고 하는 소립니다. 사법고시 준비생이 어떻게 공부할까요? 법조문을 몽땅 외워 머릿속에 집어넣는 게 우선입니다. 요령이란 게 없죠. 구구단을 생각해보세요. 그건 이해가 아니라 암기예요. 하물며 언어공부 아닙니까. 당연히 외우는 게 바탕이 돼야 해요. 외워서 하는 영어공부가 엉터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영어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어요. 전 아직도 중1 영어교과서에 나온 문장 ‘Once upon a time, there lived a king and a queen(옛날 옛적에 왕과 왕비가 살았다)’을 외우는 걸요. 그리고 요행을 바라지 마세요. 사업을 하면 100원 투자해 1만원 벌 수 있지만 영어공부는 1000원 투자하면 꼭 1000원만큼 얻어갑니다. 지름길이 없는 대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게 영어의 세계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외우는 게 효과적입니까. “일단 단어를 외워선 안 됩니다. 단어야 많이들 알죠. 그럼 뭐합니까. 써먹을 수가 없는데. 문장도 마찬가집니다. 질문 따로, 대답 따로 놀기 십상이에요. 제가 권하는 건 질문과 대답으로 이뤄진 한 쌍의 대화를 통째로 외우는 겁니다. 다만 처음 공부할 땐 자신의 관심 분야로 대화를 한정 짓는 게 좋아요. (사진기자를 가리키며) 저 양반 같으면 렌즈가 어떻고 하는 대화를 만드는 거죠. 제가 학생들에게 추천하는 공부법을 알려드릴까요? 일단 관심 분야의 대화쌍을 20개 정도 만듭니다. 그 다음, 영어발음이 유창한 사람에게 부탁해 해당 문장들을 녹음합니다. 그리고 반복해 듣고 따라하는 겁니다. 20회든 40회든 입에 붙을 때까지요. 지루하다고요? 그럼 영어 잘하는 것도 포기해야죠.”


한국인이 영어 콤플렉스를 뛰어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제까지 영어를 상전으로 모시면서 공부해왔어요. 중국인도 영어를 배우지만 그들에게 영어는 그저 소통을 위한 수단일 뿐이죠. 우리도 중국처럼 영어를 대할 필요가 있어요. 중국엔 우리나라만큼 많은 원어민 교사가 없거든요. 그래도 영어실력은 우리보다 훨씬 우수하죠. 비결은 ‘기회만 되면 떠드는’ 그들의 문화예요. 어설프더라도 자기들끼리 영어로 대화하고 지나가는 외국인 있으면 무조건 붙잡고 영어를 써보거든요. 그러니 우리처럼 돈 들여 원어민 강사 확보하지 않고도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밖에요.”


현 정부의 영어교육 정책을 놓고 각계의 갑론을박이 상당합니다. “실용영어 부문의 전문가가 좀 더 투입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영어정책을 수립하는 분 중엔 문법과 독해 중심의 ‘옛날 영어’ 전문가의 자문이 일방적으로 포함돼 있는 것 같아요. 국민의 ‘영어 입’을 트이게 하려면 실용영어 교육 전문인단을 꾸려 활용할 필요가 있죠. 영어 교육과정도 대폭 바꿔야 합니다. 현재는 기껏해야 초등 3~4학년 때까지 실용영어를 가르치다가 이후부턴 입시교육으로 쏠리는 현상이 심각합니다. 점수 올리는 데 도움 안 되니 시간 낭비란 생각에 실용영어를 버리는 순간, 영어는 생명력을 잃게 되거든요.”


선플 전도사로 산 최근 2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선플운동’을 시작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7년 3월이었으니 벌써 2년이 넘었네요. 악플에 시달리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모 연예인 사건을 접하고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악플로 상처 받고 고통을 겪는 유명인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댓글인 선플을 10개씩 달자’고 과제를 준 게 계기가 됐죠. 여기저기서 반향이 커지면서 그해 5월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함께 선플달기 국민운동본부를 발족했고 제가 대표 업무를 맡았어요. 지난 2년간 정말 열심히 뛰었습니다. 보람도 있었고요.”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악플로 인한 명예훼손 문제는 여전히 사회적 이슈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한동안 하지 않았던 ‘선플달기’ 과제를 이번 학기에 다시 내줬어요. 노 전 대통령 일도 그렇고…. 올 초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에게 악플을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요.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제 강의 커뮤니티가 있거든요. 거기에 자신이 올린 선플을 공개하고 해당 게시판의 링크까지 공개할 수 있게 했어요. 학생들 입장에서 이런 경험은 굉장히 낯설면서도 신선한 거죠. 이전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일 테니까요.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취지는 좋지만 ‘돈’이 되는 일은 아닐 텐데요. “사무실은 제 연구실 한쪽에 차렸고 직원 둘과 아르바이트 한 명 월급도 제 주머니에서 나가죠. 그래도 여기저기서 도와주시는 분이 많아 할 만합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행정안전부에서 우리 본부에 선플 활동기금 2000만원을 지원해줬어요. 그 돈으로 40개 학교에 50만원씩 지원해 선플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됐습니다. 무척 잘된 일이죠. 앞으로 지원 규모는 더 커질 겁니다. ‘선플 학교’뿐 아니라 ‘선플 직장’도 만들어야죠. 서로 격려하고 칭찬해주는 조직, 얼마나 근사합니까.”


악플의 폐해를 막기 위해 정치권에선 사이버모욕죄 도입이 논의 중인데요. “제도 도입을 통한 강제보다 캠페인을 활용한 자율 시행이 더 효과적이란 게 제 생각입니다. 사이버모욕제의 취지는 저도 십분 공감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도 사실이죠. 사이버 공간에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 당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전 인터넷 실명제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실명 공개만으로도 법적 구속력을 충분히 가지니까요. 캠페인이 주가 되고 법적 장치가 이를 뒷받침하는 형태가 무리도 없고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편에선 ‘영어교육 전문가가 웬 선플운동…?’이라며 의아해하기도 합니다. “저도 그런 질문 많이 받아요. 그런데 하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결국은 같은 일이거든요. 소통의 문제죠. ‘영어’란 도구를 활용해 세계무대에서 자신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거나 ‘선플’이란 수단을 통해 세상 사람들과 좀 더 긍정적이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다르지 않단 얘기예요. 반복학습으로 영어가 입에 붙도록 가르치는 것과 선플과제로 선플달기를 생활화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다르지 않은 것처럼요.”


선플운동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다면요. “제가 선플달기 국민운동본부를 만들고 얼마 안 있어 CNN과 생방송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요. 200여개국에서 2억5000만명 이상이 시청한 방송이었죠. 그때 경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는 선플운동의 기본 정신이 한국인의 정서와 맞닿아 있단 걸 해외 각국에 알릴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에요. 전세계적으로 품앗이나 계 문화 같은 걸 갖고 있는 민족은 한국이 유일합니다. 전 선플운동이 한류의 기본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어요. 영화배우나 가수로 대변되는 한류 말고 ‘남을 돕는 민족’이란 우리의 국민성을 상품화하자는 거죠. 한국인과 사귀면 나한테 도움이 된다, 이런 게 소문 나면 세상 사람들이 한국으로 몰려오지 않겠어요?”


성공한 리더가 되기까지


‘민병철 생활영어’란 책 한 권에서 출발한 사업의 규모가 이제 상당히 커졌습니다. “출판사로 시작해 학원사업, 전화영어사업, 온라인영어콘텐츠사업에까지 진출했죠. 제가 대학 일과 선플운동 일로 너무 바빠 둘째 아들에게 경영 전반을 맡기고 있어요. 실무적 부분은 이사들이 알아서 해주고요. 얼마 전엔 아들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경영대학원으로 유학 보냈어요. 일도 중요하지만 젊었을 때 공부를 더 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서요. 요즘은 매주 월요일마다 아들과 화상회의를 통해 업무 관계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성공의 비결이 있다면요. “제가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른바 ‘성공의 3대 요건’이죠. 첫째 열정(passion)을 가져라, 둘째 나와 관계 맺는 모든 이들을 성공시켜라, 셋째 삶의 모든 순간을 기회로 생각하고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아라 하는 거예요.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두 번째 요건이죠. 언젠가 모 은행 임원을 만난 자리에서 제가 한 얘기가 있어요. 당시 그 은행은 ‘고객감동’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던 중이었죠. ‘고객을 감동시키면 뭐합니까. 중요한 건 고객을 성공시키는 겁니다. 은행에서 성공은 뭘까요. 돈 많이 벌게 해주는 거죠. 감동은 그저 감동에서 끝날 뿐입니다.’ 이후 그 은행 광고캠페인에 ‘성공’이란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자기 앞가림도 바쁜 세상에 남을 성공시키란 주문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물론 어렵죠. 게다가 대가를 바라서도 안 돼요. 그러면 꼭 실망하게 돼 있습니다. 우리 며느리가 집사람에게 꼼짝 못하거든요. 함께 쇼핑이라도 가면 모녀지간이란 소릴 들을 만큼 가깝게 지내요. 집사람이 며느리를 사로잡은 비결이 뭔지 아세요? 사랑이에요, 끊임없는 사랑. 다른 게 없어요.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자기가 가진 모든 걸 다 줘야 합니다. 그게 시간이든 정보든 돈이든. 그런 데 인색해선 안 돼요.”


대학에서 강의할 때도 그런 부분이 반영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어떤 과목을 듣든 의무적으로 ‘글로벌 리더십 특강’이란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리더의 자질을 갖춘 유명인을 초청해 강연을 듣고 강의 내용의 이해도를 평가하는 방식이죠. 그 동안 제프리 존스 미래의동반자재단 이사장(전 주한미상공회의소 회장)을 비롯, 외국계 호텔 총지배인과 다국적기업 CEO 등 수많은 인사들이 강사로 나섰습니다. 이번 학기엔 방송인 김제동씨가 강의를 맡아주기로 했고요.”


‘민병철 생활영어’ 30주년을 맞아 새롭게 계획하고 있는 일은 없나요. “KBS에 ‘콘서트 7080’이란 프로그램이 있죠. 전 ‘민병철 생활영어’가 7080세대를 위한 실용적 영어교육의 도화선이 됐으면 해요. 중장년층 중엔 ‘이 나이에 무슨 영어공부…’라며 지레 포기하는 분이 많거든요.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어요. 시작이 힘들어 그렇지 얼마든지 잘할 수 있습니다. 제 책이 부담없이 영어공부를 재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참 좋겠어요.”


리더로서 본인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을 하나 꼽으라면요. “전 무슨 일을 하든 창의력(creativity)을 추구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예전부터 남이 하지 않은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발할 때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빨아들이는 기계가 있으면 좋겠다, 골목길 빠져나올 때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자동차 앞에도 카메라를 달면 어떨까, 엘리베이터 탑승 시간을 줄여주는 시스템이 개발되면 좋을 텐데 같은 아이디어들이죠. 그중 상당수는 실제로 상용화되기도 했어요. 선플운동을 고안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죠.”


나이에 비해 상당히 동안(童顔)입니다. “피부가 늙는 건 수분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외형뿐 아니라 내면도 마찬가지예요. 그만큼 자기관리가 철저해야 합니다. 전 오랫동안 젊은이들과 수업하고 대화하며 지내왔습니다. 제가 하는 선플 운동은 누가 들어도 공감할 만한 좋은 취지의 운동이죠. 그런 것들이 제 내면의 수분을 충분히 공급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척 바쁘게 살아요, 제가. 그게 젊음의 비결이라면 비결이죠.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정년퇴직하는 사람은 갑자기 확 늙거든요. 이래저래 늙을 틈이 없습니다.” (웃음)


사업가로서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습니까. “한국인이 스스로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외국어교육을 통해 도움을 주는 게 제 소망입니다. 유학 시절에도 느꼈지만 우리 국민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뛰어난 콘텐츠를 갖고 있어요. 영어 실력만 뒷받침된다면 지금보다 몇 단계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죠. 한국인 모두가 어떤 주제를 갖고도 세계인과 난상토론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실력을 갖출 때까지 뛸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나라가 세계 5위권 내의 선진국이 되는 날도 머지않았어요. 확신합니다.”


에필로그


“품앗이 모임 하나 만들면 좋겠어요. 나랑 둘이 만듭시다. 최 기자는 나 도와주고 나는 최 기자 도와주고. 사람들 모아서 밥 먹으면 돼요. 밥값은 내가 낼 테니까. 회장은 최 기자가 해요. 나는 고문 할게요.”


인터뷰 말미, 민 교수는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거절할 순 없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의 철학에 톡톡히 세뇌(?) 당한 덕분이기도 했지만 품앗이 모임이라, 썩 괜찮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한번 해보죠, 뭐.”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지금 우리가 모임을 하나 만들었거든, 품앗이 모임이라고. 아주 좋은 모임이야. 자네도 들어와.”


돈, 정보와 지식, 착한 마음. 그는 “주위에 사람이 모이려면 이 셋 중 하나는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도 저도 없는 처지, 품앗이 모임 회원을 늘리려면 못된 심보라도 착하게 먹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당장 뭐가 이뤄진 것도 아닌데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민병철표 엔돌핀 주사’라도 맞은 것처럼.


한국 영어교육에 대한 민병철의 제안, 제대로 말하고 싶다면 13살 전에 승부 걸어라


민병철 교수는 “우리나라의 영어 공교육이 실효를 거두려면 보다 실질적인 정책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수년 전부터 주장하고 있는 일명 ‘영어 게놈(genome·유전체)’ 작업이 그 한 예다. 그의 동의를 구해 ‘한국 실용영어교육의 정책대안’이란 제목의 논문 내용을 발췌, 소개한다.


우리가 영어를 못하는 이유는 영어 습득에 필요한 언어의 기본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있는 영어수업도 영어 구사자와 대화가 가능한 실용영어가 아닌 입시 위주의 문법, 독해 공부에 치중해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이 영어를 못하는 게 아니라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영어를 배운 적이 없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이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시험 대비용 영어’에만 치중해오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실용영어의 중요성을 깨닫고 공부하기 시작하지만 이때는 이미 언어 습득의 최적기인 12~13세를 훌쩍 넘겨 언어 학습능력이 현저히 저하된 후다. 대학생 시기엔 전공과목을 영어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하지만 현재는 영어권 국가의 초등생 수준에 불과한 실용영어 습득에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고 있다.

전문 영어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문제다. 현재 우리나라엔 전문 영어교사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과 연수기회가 전무한 실정이다. 원어민 강사 채용시 검증과정이 빈약한 건 물론, 교육과정도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 원어민 강사의 수급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중장기적으로 도입할 만한 개혁과제를 ‘영어 게놈’이란 이름으로 제안한다. 첫째, 초등 1학년부터 영어교육을 실시하고 교육 시수를 확대하며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실용영어 능력 측정 항목을 확대하는 등 교육정책 전반을 개선한다. 둘째, 국립 영어교육원을 설립해 ‘교사 채용→연수→평가’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셋째, 한국인 영어교사 평가시스템을 구축한다. 넷째, 한국인 영어교사 교수능력 향상을 위한 연수기회를 확대한다. 다섯째, 원어민 영어교사 평가 시스템을 마련한다. 여섯째, 실용영어 평가 테스트를 개발한다. 일곱째, 각급 학교에 u-learning(유비쿼터스 이러닝) 체계를 구축해 영어교육 기회 격차를 해소한다.


| 민 병 철 | 1950년생으로 1973년 중앙대를 졸업했다. 미국 노던일리노이대에서 교육학 전공으로 석사학위(1991)와 박사학위(1998)를 취득했다. 1979년 국내 최초의 생활영어 전문교재 ‘민병철 생활영어’를 펴내 30년간 1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1988년부터 1991년까지 MBC TV에서 생활영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중앙대 객원교수와 겸임교수를 거쳐 2005년부터 중앙대 교양학부 전임교수로 실용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1984년 BCM어학교육연구소(현 BCM교육그룹)를 세웠다.


1994년 실용영어경시대회 분야 최초로 원어민과의 즉흥영어경시대회를 창안, 도쿄(2002)와 베이징(2004) 등에서 국제대회를 치렀다. 2002 한·일월드컵 조직위원회 자문위원(2002)을 역임했고 2005년 베이징시와 공동으로 ‘한·중·일·미·러 5개국 국제대학생 영어평화포럼’을 개최했다. 2006년부터 국제문화산업교류재단 한류정책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2007년 서울 서초구청과 손잡고 영어 공교육 프로그램을 총괄 개발했다. 현재 경기 파주 영어마을과 제주 영어전용타운의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2007년 사단법인 선플달기국민운동본부를 설립, 2년째 선플운동을 펼치고 있다. 2008년 ‘노던일리노이대학을 빛낸 동문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