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쉴 수 있어 (感謝)

"갈 때도 무(無)! 올 때도 무! 항상 무 하세요"

물조아 2009. 3. 11. 08:46

만해의 제자 춘성 스님 일대기 정리한 평전 나와,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


야간 통금이 있던 시절 방범 순찰을 하던 경찰관이 밤길을 가는 행인을 보고 누구냐고 묻자 "중대장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순경이 플래시로 얼굴을 비춰보니 중대장이 아닌 어떤 스님이었다. "아니, 스님 아니시오?" "그래, 내가 중(僧)의 대장이다."


이 일화의 주인공은 춘성(春城·1891~1977) 스님이다. 법문 때에도 거친 육두문자를 서슴지 않고, 헐벗은 이를 보면 입었던 옷을 모두 벗어주는 등 기행(奇行)으로 잘 알려진 춘성 스님의 일대기를 정리한 평전이 나왔다. 부천대 김광식 교수가 펴낸 《춘성―무애도인 삶의 이야기》(새싹)이다.


1부 〈일대기〉와 스님과 인연이 있었던 이들이 전하는 2부 〈내가 만난 춘성〉, 3부 〈일화로 만나는 춘성〉으로 구성된 책을 보며 만나는 춘성 스님은 스승인 만해 한용운 스님을 극진히 모시는 효심(孝心) 깊은 제자요, 이미 30대에 불교경전 공부의 경지에 이른 강사이자 당대의 선승(禪僧)이다. 그는 만해가 3·1운동으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를 때에는 절에 땔감이 가득해도 "스승이 왜놈들한테 붙잡혀 추운 감방에서 떨고 계시는데, 그 제자인 내가 어찌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겠느냐"며 냉방(冷房) 생활을 자청하며 옥바라지했다. 옥중의 만해가 휴지에 적어 돌돌 말아 건넨 '조선독립의 서'를 감옥 밖으로 빼내 전국과 해외에까지 전파한 것도 춘성 스님이었다.


백용성 스님이 우리말로 번역한 《화엄경》을 설하는 강사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1930년대 들어서는 홀연히 서울을 떠나 수덕사를 찾는다. 당대의 선승 만공 스님을 찾아 투철한 참선 수행에 들었던 것이다. 이후 6·25 와중에도 도봉산 망월사를 떠나지 않고 수행했던 그는 평소 목침을 베고 배에만 방석을 덮고 자면서 이불은 멀리했다. 일흔이 넘어서도 자신보다 스무살 젊은 성철 스님이 밤새 한번도 눕지 않고 좌선하는 것을 부러워했고, 만년에도 "갈 때도 무(無)! 올 때도 무! 똥 쌀 때도 무 하세요"라며 간화선(看話禪) 수행을 강조했다.


그는 입적을 앞두고 "열반에 드신 후에 사리가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라고 묻는 후학에게 "필요 없다"고 했고, 다시 "사리가 안 나오면 신도들이 실망할 터인데요"라고 묻자 "시X 놈의 자식! 신도 위해 사나?"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그는 입적 후에도 절대로 사리를 찾지 말고, 비석과 부도는 세우지 말 것이며, 오직 수행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투철한 수행과 일반인의 눈에 특이하게 보이는 기행으로 한 생을 살다간 그를 보내는 날 밤, 명진(현 봉은사 주지) 스님을 비롯한 후배 선승(禪僧)들은 다비식장에서 그가 생전에 즐겨 불렀던 〈나그네 설움〉 등을 부르며 노래 자랑(?)을 벌였다고 한다.

 

사진 ▲ 시내에 갈 때는 양복을 입고, 영화 관람도 즐기면서도 수행에 있어서는 추상 같았던 춘성 스님. 그는“입적 후에도 사리를 찾지 말고, 비석이나 부도도 세우지 말라”고 했다. /새싹출판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