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은 새로운 경쟁의 시작일 뿐입니다."
서울 신림동 고시촌 학원가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 "시험에 합격했다고 자만하지 말고 새로운 경쟁에 대비해 우리 학원에 와서 배우라"는 선전 문구다. 바로 사법시험 합격자들을 자극하기 위한 광고다.
100명 미만을 뽑던 예전의 '사법시험'은 입신출세의 대표적인 코스였다. 합격한 것 자체만으로도 미래가 보장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연간 300명 선이었던 '사시(司試)' 선발인원은 2001년부터 1000명으로 불어났다.
선발 인원이 늘어나면서 사시 합격자의 희소성은 줄었고, 또 다른 경쟁이 시작됐다. 합격 후 2년간 교육을 받는 사법연수원에서의 성적이 판·검사 임용과 대형 로펌 취직 등 진로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됐기 때문이다.
2년의 연수원 생활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서 많은 사시 합격자들은 '선행(先行) 학습'을 해왔다. 연수원에서 배울 내용을 미리 공부하는 것이다.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법학원으로 달려가 수강신청을 하는 게 요즘 고시촌 풍속도다.
연수원 생활도 삭막해졌다. 고3 학생들 못지않게 공부해야 하는 상황을 빗대서 연수원생들은 "우리는 '마두고(高)' 학생들"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을 쓴다. 연수원이 경기도 고양시 마두역 인근에 있다는 걸 빗댄 말이다. 친선 축구경기에 나선 연수원생들이 공부할 시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부러 경기에 지는 일이 속출하자, 결국 진 팀도 경기를 계속하는 패자부활전 방식이 도입되기도 했다고 한다.
사회 전반에 퍼진 취업난으로 이 같은 경쟁은 최근 더욱 격화됐다. 올해 사법연수원 수료생 중 군입대를 제외한 취업대상자 787명 가운데 44%인 347명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취업률이 36%였던 지난해보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결국 판·검사 임용이나 대형 로펌 취직 안정권에 들기 위해서는 300위 안에는 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몇 년 전에는 학업 스트레스를 못 이긴 연수원생이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사건도 있었다. 연수원은 2007년 학업 문제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연수원생들을 위해 '심리상담센터'를 만들었다. 고양시 정신보건센터 소속 전문의와 간호사가 상담을 하고 치료가 필요할 경우 적절한 병원을 소개해 주는 제도다.
지나친 경쟁은 다른 부작용까지 낳고 있다. 최근 예비연수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불법 강의를 하던 연수원생들이 적발돼 징계를 받았다. 연수원생들은 국가공무원법 64조에 따라 돈벌이를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 연수원을 수석 졸업, '대법원장상'을 받기로 돼 있던 연수원생까지 돈을 받고 동영상 강의를 찍은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연수원생들이 "예전부터 있던 일인데, 재수 없이 걸린 케이스"라고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성적 위조' 사건까지 터졌다. B씨는 대기업 2곳에 원서를 내면서 연수원 성적표를 스캔한 뒤 그림파일을 고쳐 성적을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쯤 되면 윤리의 차원을 넘어 범죄의 문제가 된다.
사법연수원 수료생 가운데 절반 이상은 국가를 위한다기보다는 변호사나 기업체 취직 등으로 자기 돈벌이 하러 나서는 게 현실이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까지는 몰라도 준법 정신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면, 해마다 500억원씩 나랏돈을 쓰는 사법연수원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없다. 조선일보 조정훈 사회부 차장대우
'숨을 쉴 수 있어 (感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드슨강의 영웅! 왜? 우린 이런 영웅을 안 만들까? (0) | 2009.01.18 |
---|---|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 순간을 즐겨라, 오늘은 오늘이다! (0) | 2009.01.16 |
"70까지 칼잡이로 살겁니다" '肝이식 최고 권위' 서울아산병원 이승규 교수 (0) | 2009.01.11 |
[사설] 국회의원 지역구 확 줄이고 비례대표는 폐지해야 (0) | 2009.01.11 |
[강천석칼럼] 국회의원 숫자 줄이기 서명 운동 벌여야 (0) | 2009.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