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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周易)에 달통한 조선의 군왕들

물조아 2008. 9. 13. 16:36

 

당대의 학자들과 토론하고 세자·신하 직접 가르치기도. 유학의 텍스트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그 중에서 '주역(周易)'이 으뜸이라는 것은 한중일(韓中日) 동양3국에서는 누구나 알아야 하는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조선의 주요 국왕들이 바로 이 주역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었던 인물들이라는 사실은 우리 한국인에게도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태종의 '주역'읽기는 이미 왕위에 오르기 직전부터 시작됐다. 정종 2년(1400년) 5월 17일 이서(李舒)라는 신하와 함께 '주역'을 읽던 중 이서는 어느 대목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풀이한다. "남의 윗사람이 된 자가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하였으니, 법을 범하면 비록 종친이라도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주역'에 정통한 성균사성 장덕량(張德良), 대사성 유백순(柳伯淳) 등을 따로 불러 '주역'을 파고들었다. 태종이 유난히 좋아했던 '주역'의 구절은 '履霜堅氷至(이상견빙지)'였다.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에 이른다'는 뜻으로 세상 흐름의 기미(機微)나 징후를 먼저 알아서 대처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래서일까? 처남 민씨 4형제는 '외척 발호의 조짐이 있다'는 이유로 세상을 떠나야 했다.


세종이 '주역'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돼가던 세종 7년(1425년)부터였다. 세종은 그 스스로 "강용(强勇)한 기질이 없어 바탕이 부인과 같다"고 걱정했던 세자(훗날의 문종)에게 '주역'을 직접 가르쳤다. 세종은 주역을 통해 한글창제의 철학적 원리를 확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세조 또한 아버지 세종 못지않게 '주역'에 관한 한 통달(通達)의 경지에 올랐다. 신하들에게 '주역'을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당대를 대표하는 학신(學臣)들과 함께 '주역'에 우리말 토를 달아 '주역구결(周易口訣)'을 간행했다. 당시 신하들 중에서 세조가 공식적으로 인정했던 '주역'의 대가는 정자영(鄭自英)이었다. 관리로서의 이재(吏才)는 약했지만 학재(學才)가 출중했던 정자영은 주로 성균관에서 제자 양성에 힘을 쏟았고 성종 초 예조판서에 오른다.


성종도 스무 살을 막 넘긴 성종 8년(1477년) 2월부터 경연에서 '주역'을 공부한다. 강의는 훗날 정승에 오르게 되는 김응기가 맡았다. 1년 넘게 공부를 했지만 아쉽게도 성종은 '주역'공부가 한창이던 때에 왕비 윤씨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주역'의 근본정신 중 하나가 '자연질서에의 순응(順應)'임을 고려할 때 윤씨 폐비사건은 아무래도 반(反)주역적 처사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아들 연산의 폭정과 비극적 종말은 그래서 성종의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중종도 20대 중반이던 중종 6년(1511년) 경연에서 '주역'을 공부했다. 그러나 중종 때 조광조가 사사되는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왕통을 둘러싼 혼란이 시작됐다는 점에서 그의 '주역' 공부 또한 성종과 마찬가지로 높은 점수를 받기는 어려울 듯하다. 공부는 공부, 정치는 정치였던 것일까?


선조의 '주역'읽기도 특기할 만하다. 선조는 두 차례에 걸쳐 '주역'을 강독했다. 한 번은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주역'에 몰두하며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고뇌했고 또 한 번은 전란이 끝난 후 후계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서 다시 '주역'에 빠져들었다. 그 결과는 실패였다. 억지로라도 어린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하다가 결국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죽였고 다시 광해군은 신하들에 의해 내몰렸다. '주역'은 읽기도 어렵지만 가르침을 따르기는 훨씬 더 어려운 책인지 모른다.


선조 때부터 사림의 세상이 열렸다. 사림들은 가장 어려운 '주역'보다는 가장 쉬운 '소학(小學)'을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삼았다. '소학동자'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기보다는 마음가짐을 중시했다. 그러다 보니 숙종 때 '주역'을 강하는데 특진관 권열(權說)이라는 인물은 "승지가 만류하는데도 이것저것 늘어놓고 그나마 말소리만 크고 갈팡질팡 허둥대어 임금이 괴이하게 여기는 표정을 지었다"(숙종 12년 1686년 4월 16일)고 한다.


영조 12년(1736년) 6월 3일에도 '주역'강의와 관련해 영조가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자 홍문관 관리들 중에 제대로 답변하는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임금을 가르쳐야 하는 '스승'이란 인물들이 갈수록 태산이었던 것이다. '주역'을 통해 봐도 조선전기가 조선후기보다 훨씬 앞선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