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방천 에셋플러스 회장은 서울 역삼동에 사무실을 낸 이유에 대해“예전에는 시장이 가까운 여의도에 있어야만 좋은 정보를 빨리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인터넷 덕분에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신 그는 돈 있는 고객들이 편하게 올 수 있는 곳을 택했다. / 조인원 기자
원조 수퍼개미 강방천이 말하는 대박인생, 97년 1억으로 시작, IMF 2년간 156억으로 불려, 주식 불황 오래 안가, 생존기업은 가치 더 올라, 여윳돈 인내심만 있다면 지금이 펀드투자 적기
돈 없는 사람도, 돈 있는 사람도 불안한 세상이다. 부동산과 주식 값이 국내외에서 폭락하고 있다. 다수가 공포(恐怖)를 느낄 때 그것을 '고통의 축제(祝祭)'라며 즐기는 소수가 있게 마련이다. 강방천(姜芳千·48) 에셋플러스 회장도 그 중 한 명이다.
강 회장은 '원조(元祖) 수퍼 개미'로 불린다. 1997년 1억원을 들고 투자를 시작해 2년 만에 그 돈을 156억원으로 만들었다. 지금의 에셋플러스도 그때 마련한 자금으로 만든 회사다. 1997년이 언제인가? 모든 국민이 나라가 망한다고 떨던 그때다.
강 회장을 22일 서울 강남 파이낸스센터 21층에서 만났다. 서울에서 가장 비싼 건물을 딛고 선 그는 2시간 동안 이뤄진 인터뷰 내내 질문하기가 겁날 정도로 많은 말을 했다. 그는 한국주식시장에 떠다니는 공포를 즐기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최근 일반인을 대상으로 펀드 판매를 시작했던데, 하필이면 시장 상황이 제일 안 좋을 때를 골랐나요.
"공포가 확산될 때가 제일 좋은 법이지요. 시장 상황이 나빠지면 '고통스러운' 축제가 열립니다. 1등 기업의 경쟁자들이 죽어납니다."
―소위 2등 기업이 사라지는 게 그리 즐거운 겁니까.
"시장이 반등(反騰)할 때는 1등 기업이 제일 빠르고 강합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 1등 기업들의 시장 점유율이 높아졌습니다. 불황에서 생존하면서 가치는 더 올랐습니다."
―2위부터는 다 죽고 1등 기업의 주식가격이 하락할 때가 투자의 적기(適期)라는 겁니까. 투자자들은 주가 하락 시에는 완전한 하락을 기대하잖아요.
"저는 그 가격은 못 찾겠습니다. 너무 일시적이어서 정확히 짚는 사람이 있을 수 없지요."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니 '공포 상황'에서 높은 수익을 거둔 적이 많은 모양이죠.
"제가 대책 없이 저지르는 스타일입니다. 세 번 운이 좋았습니다. 1990년대 초반, 쌍용증권의 지점 중개인에서 주식 운용팀으로 보직이 바뀌었을 때인데, 저는 이미 그때 '주가 수익 비율(PER)' 같은 개념을 이용해서 주식을 매매했어요. 마침 자본시장 자유화 조치로 그런 개념이 유행했습니다. 덕분에 다른 주식은 다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저의 수익률은 높았지요."
강방천 회장에게 찾아온 두 번째 운은 IMF 외환위기였다. 주식이 폭락하는 시점에 튼튼한 주식을 산 뒤 제 가치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안 팔았다. 그가 1998년 4월 주당 600원과 700원을 주고 산 대신증권과 동양증권 우선주는 그해 12월 평균 1만원이 넘게 올랐다. 투자한 3억원은 53억원이 됐다.
세 번째 운은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금리 하락이었다. 정기예금 금리가 10%에서 4~5%로 떨어지자 자금이 주식시장으로 흘러들었다. 그 결과 2007년 코스피지수(옛 종합주가지수)는 2000을 돌파하기도 했다. 그가 만든 투자자문사는 자리를 잡았다.
―원래 돈 있는 집안 자식에게 돈이 붙는다지요.
"부자는요, 제 고향이 전남 신안군 암태도입니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고 남에게 빌려 염전(鹽田)을 했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배 타고 1시간20분 걸리는 곳이었어요. 중학교까지 섬에서 다녔고 고등학교 때 목포로 유학왔지요."
―허연 염전을 보며 돈 벌 꿈을 꿨나요.
"어릴 때부터 지도를 좋아했어요. 구하기 힘든 지도를 어쩌다 구하면 벽에 붙여놓고 마음속으로 방랑을 꿈꿨습니다. 그래서 지리학 교수가 꿈이었습니다."
―공부는 잘했습니까.
"1979년에 한국외대 경제학과에 갔는데 이후 생긴 '경영정보학과'에 완전히 반했어요. 군대에서 보초 서면서 공부해 학력고사 다시 보고 외대 경영정보학과 84학번이 됐습니다. 장학금도 받고 7학기 만에 졸업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동방증권에 취직했지요?
"1987년에 입사했는데 전산실 발령을 받았어요. '286' 컴퓨터 쓸 때였습니다. 학교 다닐 때 회계학이 재미있었고 컴퓨터 언어 짜기 이런 건 정말 흥미가 없었어요. 바로 옆방이 주식 운용실이었습니다. 어깨 너머로 보니 회계학을 이용하더군요. 그게 하고 싶었습니다."
2년 뒤 강 회장은 동방증권을 그만뒀다. 미국으로 유학 가 증권 공부를 다시 해 '전산(電算)' 경력을 지우고 싶었다. 그런데 아내가 연년생으로 임신하는 게 아닌가. 그는 쌍용증권에 입사했다. 기업 대차대조표를 보는 것이 그리 좋았다고 강 회장은 말했다.
그때부터 성공할 때까지의 경험을 강 회장은 책으로 냈다. 2006년 나온 '강방천과 함께하는 가치투자'라는 책이다. 주식투자는 하루하루의 가격보다 기업의 본질가치에 따라 하라, 기업 가치만큼 주가가 오를 때 주식을 팔라는 것이다.
―주식으로 돈 벌었으니 집도 샀겠죠.
"1996년 경기도 구리의 30평형 아파트를 샀죠. 지금 가지고 있는 집은 경기도 용인의 전원주택뿐입니다. 그나마 5년 전에 아이들 교육 때문에 서울로 올라왔지만요. 11억원 전세로 타워팰리스에 삽니다."
―부동산은 자신이 없나요?
"제가 부동산 전문가는 아니지만 (투자시점은) 아닌 것 같아요. 강남 빌딩 임대 수익률이 5%나 나올까요? 지금 우리나라 부동산의 3분의 1은 국가 것이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세금이 이렇고 높고 인구도 계속 줄어들잖아요. 물론 최고급 1등 부동산은 예외일 것 같습니다."
―증권가는 여의도인데 왜 강남에 사무실을 냈나요.
"금융사가 여의도에 많은 건 시장이 가까워서 얻을 수 있는 정보 때문이었지요. 지금은 인터넷 때문에 정보가 너무 많습니다. 통신만 잘 되면 남극에 있어도 상관없는 시대가 된 거죠. 그렇다고 시골로 갈 수는 없고, 돈 있는 고객들을 생각하다 보니 강남을 택했습니다."
에셋플러스는 지난 7일부터 일반 고객들을 대상으로 펀드를 팔고 있다. 그러나 다른 펀드가 은행이나 증권사를 통해 팔리는 것과는 달리 자신들이 직접 판다.
그는 "펀드를 기획한 원리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려면 직접 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많이 팔렸습니까.
"보름쯤 됐는데 256억원이 들어왔어요. 절반이 적립식입니다. 고객 한 명이 평균 30분에서 1시간 정도 직원에게 듣는 것 같습니다."
―상담의 원칙이 있나요.
"기대수익을 낮추라고 합니다. 1년 정기예금 금리의 두세 배를 벌 수 있다면 엄청난 수익률이라는 점을 알려주는 거죠."
―비교해서 뭐하지만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보다 잘할 수 있습니까.
"당연하죠."
―박 회장처럼 강 회장도 중국을 강조합니까.
"중국은 성장하는 국가입니다. 중국 주식을 사서 모두 계속 갖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적당한 시점에는 팔아줘야죠. 국가가 계속 성장하는 청년기에는 채권이 주식보다 수익률이 훨씬 높은 법이죠. (실제로 에셋플러스는 작년 가을 중국 주식을 많이 교체해 최근 폭락에서 피해를 덜 보고 있다고 한다.)
―지금 펀드 가입을 외치는 게 정말 정석인가요.
"여유자금이 있고 인내심이 있다면 지금이 적기입니다. 주식 불황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1970년대 1차 오일쇼크 때 1년 6개월, 블랙 먼데이 때 9개월, IMF 외환위기 때 1년 2개월 정도였어요. 1등 기업은 더 빨리 원래 주가를 회복합니다."
펀드매니저는 고객이 맡긴 돈을 제대로 굴리지 못했을 때만 도의적 책임을 느낀다는 말이 있다. 영화 '공공의 적' 1편에 이 말이 나온다. 반대로 고객 돈을 까먹으면? 강 회장 같은 펀드매니저는 설 땅이 없는 것 아닌가.
―실패한 적도 있죠.
"있습니다. 2000년 2001년, 개인 돈 40억을 코스닥에 투자했다가 다 날린 적이 있습니다. 비상장 주식이었는데, 그때 1등 기업 주식을 사는 게 왜 중요한지를 알았습니다."
―돈 버느라고 취미를 즐길 틈도 없겠죠.
"자전거를 탑니다. 주말에는 7~8시간씩 타기도 해요. 대신 골프는 거의 안 칩니다. 자전거는 500만원입니다. 비싸죠. 오래 쓸 것에는 많이 투자해야 한다는 게 소신입니다. 제 자전거를 5년 쓴다면, 1년에 100만원씩입니다. 골프 세 번 안 치는 돈이죠. 교육, 건강은 평생 쓰는 것이기 때문에 돈을 아낄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고 보니 강 회장 왼손의 커다란 시계가 눈에 띄었다. 1600만원짜리 '파네라이'라는 브랜드인데 19세기부터 군인 전용으로 쓰였다는 시계다. 그는 "중국에 갔을 때 돈 번 중국인들이 7억짜리 시계를 찬 모습을 보고 놀랐다"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들이여, 그렇게 실컷 돈을 써라, 나는 그 시계 회사 주주 될게, 흐흐흐." 조선일보 정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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