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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사비 인플레… “물가보다 더 치솟아”

물조아 2008. 5. 29. 09:19

3만원은 왠지… 체면 차리다 허리 휜다. 하객 절반 5만원 봉투, 3명중 1명은 10만원, 9년 전엔 ‘기본 3만원’, 4년간 증가율 18.7%


“한달 50만원 지출 예사” 은퇴자 생활에 큰 타격 “사회적 지위 과시 변질 비현실적 관행 고쳐야”


《“이달도 국민연금 받은 돈이 경조사비로 다 나갔습니다.”


국내 유수의 시중은행에서 지점장을 지내다 2002년 은퇴한 이모(58) 씨. 그의 한 달 생활비는 2년 전부터 받고 있는 국민연금 56만 원에 저축 인출을 합해 200만 원 남짓이다. 그는 지난달에만 각종 경조사비로 생활비 중 55만 원을 썼다.


이 씨는 은퇴와 함께 좋아하던 골프를 끊었지만, 결혼을 앞둔 세 자녀를 생각하면 경조사비 지출만은 ‘끊을’ 수 없는 형편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인 이상 전국 가구가 지난해 지출한 경조사비는 평균 51만9000원, 지난 한 해 국민이 경조사비로 사용한 돈은 7조6681억 원이었다. 관련 통계가 있는 2003년 이후 4년간 2인 이상 가구의 경조사비 지출액 증가율은 18.7%로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11.6%)보다 높았다.


경조사비 지출액이 물가상승률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오르면서 생활에 큰 부담을 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경조사비 문화를 바꾸기 위한 국민운동’ 같은 것이 시작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


○물가보다 2, 3배 빨리 오른 경조사비


본보 취재팀은 올해 5월 결혼한 회사원 A(30·서울) 씨의 축의금 장부를 금액별로 분석해봤다. 하객 중 약 절반이 5만 원을 냈고 10만 원을 낸 사람은 3명 중 1명꼴이었다. A 씨는 호텔이 아닌 서울 시내의 평범한 예식장에서 혼사를 치렀다.


1999년 2월 결혼한 B(41) 씨는 A 씨의 회사 선배로 결혼 당시 A 씨와 거의 비슷한 사회적 위치였다. B 씨의 축의금 장부를 보면 전체의 약 절반이 3만 원이었다. ▶표 참조


이처럼 한국의 축의금액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친분도가 조금 떨어지지만 모르는 척할 수 없을 경우에 내는 ‘낮은 금액’, 가장 보편적인 ‘기준 금액’, 꽤 친밀한 상대에게 내는 ‘높은 금액’의 3단계가 그것이다. 3단계는 시대에 따라 ‘1-2-3’ ‘2-3-5’ ‘3-5-10’ ‘5-10-20’의 패턴을 반복한다. 이를 넘는 것은 통상 친족이 내는 ‘고액 축의금’에 속한다.


A, B 씨의 경우를 비교해 보면 9년이 지났지만 △3단계 패턴이 그대로 유지됐고 △단계별 비중에도 큰 변동이 없었으며 △금액 분포만 9년 전 ‘2만, 3만, 5만 원’에서 ‘3만, 5만, 10만 원’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단순 비교하면 9년간 낮은 축의금은 50%, 기준 축의금은 67% 올랐다. 또 높은 축의금은 5만 원에서 10만 원으로, 고액 축의금 기준은 10만 원 이상에서 20만 원 이상으로 갑절이 됐다. 1999년 2월부터 올해 4월까지 소비자물가가 31.5% 오른 것과 비교하면 그간의 ‘축의금 인플레이션’은 물가상승률의 2, 3배 수준으로 추산된다.


게다가 A, B 씨의 축의금 분포로 봤을 때 낮은 금액의 비중은 축소됐고, 높은 금액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팽창해 있어 기준 금액이 5만 원에서 10만 원 쪽으로 ‘강한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사회 변화에 뒤진 경조사 문화


예비역 소장 C(61) 씨는 6년 전 전역했지만 경조사를 챙겨야 할 사람이 아직 많다. C 씨는 “결혼 성수기인 요즘 ‘경조사비 부담 때문에 이민 가고 싶다’는 예비역 동기도 많다”고 전했다.


특히 과거 10년 남짓했던 은퇴 후 기대 여생이 30∼40년으로 크게 늘고 있다. 노년 들어 고정소득 없이 경조사비를 내야 하는 기간이 훨씬 길어진 것이다.


전통 농경사회에서는 경조사비가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상호부조 또는 사회보험’ 성격이 짙었지만 도시화와 개방화로 공동체의 범위가 불분명해지면서 ‘주고받기’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 예컨대 결혼한 동료가 이직, 퇴직을 하면 돌려받기가 힘든 것. 자연히 ‘권력’을 가진 쪽에 돈이 몰리고 사회적 약자일수록 물질적으로도 손해를 보는 불평등 구조로 변질되기도 했다.


중앙대 신인석(경제학) 교수는 “경조사비를 내는 것은 네트워크를 쌓는 기능을 한다. 가령 ‘내가 이 모임(그룹)에 속해 있다’는 신호를 보내거나 때로는 이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행사에 참석하거나, 축의금만 내고 정작 식장에는 들어가지 않는 일부 관행도 이와 무관치 않다. 때로는 뇌물의 성격까지 띤다.


최근에는 부조금이나 화환 대신 쌀 봉투를 받아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람이 생기는 등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만 낡은 관행을 바꾸려면 사회 지도층이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또 부모 중심이 아닌 당사자 중심의 예식을 올리는 것, 하객을 친분 깊은 지인으로 한정해 소박한 결혼식을 올리는 것 등도 대안으로 제시된다.


성신여대 강석훈(경제학) 교수는 “지불 능력을 뛰어넘는 경조사비 문화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 거품”이라며 “사회의 리더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차원에서 이를 걷어내는 데 앞장서야 하며, 일종의 ‘운동’ 형태를 띨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박중현 기자 유재동 기자 장원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