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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보다 더 나쁜 것은?

물조아 2007. 4. 16. 01:33
 무관심보다 더 나쁜 것은?


1. 아이들 사이에서도 자주 오가는 말인데 ‘무관심보다 더 나쁜 것은 관심을 갖는 척 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사는 게 그렇다. 정치꾼들은 민생을 걱정하는 척 하면서 권력을 챙기고 의료계는 국민건강을 염려하는 척 하면서 장삿속을 챙기고 교육계는 교육을 걱정하는 척 하면서 밥그릇을 챙긴다. 학계는 연구하는 척 하면서 프로젝트를 챙긴다.


우리 사회 어느 구석을 보아도 일에는 관심이 없고 일하는 척 하는 것에 이력이 나 있다. 그래서 정작 일은 안하고 일하는 척 하는 이벤트에 열중한다. 일 하는 척 하는 것이 일이 되어 있다. 일하는 척 하는 기법만 발달하고 있다. 그러니 일 같은 일이 없고 일 같이 되는 일이 없다.


무관심하다는 것은 게으른 것일 뿐이다. 그러나 ‘관심을 갖는 척하는 것’은 사기나 다름없다. 법망을 빠져나가는 고급사기다. 차라리 ‘관심을 갖는 척’하지 않는다면, 우리사회가 이토록 오염되고 혼탁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관심을 갖는 척’하는 기법만이 고도로 발달하고 보니, 마치 농약과 화학비료로 오염이 될 대로 된 토양과도 같이 구제할 길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2. 프로와 아마의 차이를 구분하라면, 그냥 좋아서 관심을 갖는 것이 아마추어이고 직업적 관심을 갖는 것이 프로라고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실은 그렇지가 않다.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정말 프로들, 진정한 프로는 일하는 그 순간에는 직업의식, 직업적 관계를 떠난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이렇다. 언젠가 ‘내셔널 지오그래픽’ 촬영전문가들이 북극의 생태계를 촬영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는데, 생태계의 변화 현장을 잡기 위해서 얼음판 위에서 6개월을 산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인상 깊게 본 것은, 몇 장의 사진을 건지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다시피 하는 촬영현장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러나 북극의 동물을 추적하면서 어느 새 동물과 가까워지고 동물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들의 심리를 읽으면서 그 동물들과 친구가 되어가고 친구처럼 그들을 걱정하는 모습, 그것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진정한 프로의 세계가 무언지를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다른 분야의 프로들, 진짜 프로들은 그럴 것이다. 아마와 프로의 차이가 그것일 것이다. 관심을 가지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대충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관심 그 하나에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돈에 자신을 던지는 것도 아니고 인기에 자신을 던지는 것도 아니다.


3. 무심(無心)이라는 말이 있다. 무관심(無關心)이라는 말은 마음에 없다는 말이지만 무심(無心)은 그와는 전혀 의미가 다르다. 무심이라는 말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딴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도와 계산 그리고 작위성을 개제시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관심(關心)의 최고 경지, 오로지 그 하나에 관심을 갖을 수 있을 때가 무심(無心)인 셈이다. 아름다움의 정의가 달리 있을까? 무심한 만큼 아름다운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무심한 만큼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남아 있어야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사연을 전하는 무영탑(無影塔), 왜 그림자가 없다고 했을까? 그림자가 없다는 것, 무심(無心)으로 만들었기에, 몸과 마음을 모두 쏟아 부었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다는 극찬을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석가탑은 천여 년 세월을 건너뛰어서 오늘에도 전해진다. 오늘날의 불사(佛事),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런 불사들이야 하루아침에 무너져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들이지만.


앞으로 다가올 무한 경쟁의 험난한 시절, 무너질 것은 무너지고 남을 것은 남는다. 진정한 프로들만이 살아남는다. ‘관심을 갖는 척하는 것’들은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마치 거품이 꺼지듯이. 그렇다면 우리의 생존방식은 어떠해야할까? ‘관심을 갖는 척’하는 사기의 기술을 더욱 개발해야 할까? 아니면 ‘무심(無心)’의 프로와 같은 생존방식을 배워야할까?  배영순(영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