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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 / 나는 누구 인가? (Who am I)

물조아 2014. 6. 2. 21:13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 / 나는 누구 인가? (Who am I) /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할 때 이렇게 묻는 분들이 많습니다. “제가 잘 몰라서 하는 질문인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질문은 그냥 질문입니다. 질문을 했다는 사실만 있습니다. 질문에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천하는 나의 자발성으로 이루어져서 천하가 이루어져야지, 이념이 지배하는 틀에 갇힌 나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함석헌이라는 아주 독특한 철학자를 만나게 됩니다. 함석헌 철학자는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나라는 학생운동의 역사가 세계에 어디에 내 놓아도 강력한 인상을 줄 수 있는 강력한 학생 운동의 역사를 가졌습니다. 학생 운동을 주도 하던 학생들은 다 정의와 도덕으로 무장해 있었습니다.

 

자 그럼 학생들이 학생운동을 마치고 졸업을 했을 때, 그 학생들의 숫자만큼 사회는 정의와 도덕의 양이 증가 했는가? 정의와 도덕의 질이 높아 졌는가?

 

함석헌의 눈으로 볼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지 않은가?

 

혁명을 하는 사람들이 혁명을 하는 개별자들이 혁명되지 않은 채 혁명을 하고 있다. 혁명이라는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이념을 혁명이념을 수행만 했지 혁명가가 혁명되지 않은 채 혁명을 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냅니다.

 

자 자발성, 독립성, 주체성, 주체력 이런 것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범위 안에 제한 된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진정한 변혁과 그 사회의 진정한 발전과 그 사회의 진정한 품격에 직접적으로 기원이 된다.

 

자쾌! 자쾌라는 개념을 다른 말로 하면 자유(스스로 즐기는 것) 개념입니다.

 

이 자유는 무엇이냐? 전체애에 대항하는 나의 활동이 아니라 나의 자발적 생명력 나의 내적인 활동성 그것을 그 근원으로 해서 내 삶을 끌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자유의 개념만이 바로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다. 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념의 수행자가 아니라 내적 자발성의 실천자가 되겠다. 내 이념 속에 고정되지 않고 나는 사건의 담당자가 되겠다. 경계에 서겠다.

 

우리는 많은 책을 읽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읽는 것은 누군가가 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읽는 그 대상은 누군가가 써놓은 것입니다.

 

읽는 상황 속에서는 읽기와 쓰기가 교차 된다.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도 언젠가는 한 번 책을 쓸 수 있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글로 쓴다는 것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글로 쓴다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자기를 표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말을 듣는 이유는 우리가 말을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듣는 행위는 누군가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말하는 것을 듣다가 내가 말하는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내가 계속 읽기만 하다가 내가 걸어야 될 길 내가 쓰는 길은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우리는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공부를 하는 목적은 누군가가 가르쳐 놓은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가르칠 수 있는 입장이 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정해진 것을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정해진 것을 학습하는데 제한 된 것도 아니다. 정해진 것을 실천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내가 한번은 정해보기 위해서다. 내가 나를 표현하는 것이다.

 

며칠 전에 예술가를 만나서 식사를 하면서 그 분이 말하기를 “요즘 배우는 재미에 빠져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은 앞으로도 창의적으로 되기 어렵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금 이 나이에 배우는 재미가 그렇게 좋다니 그것은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이제 그만 배우세요. 지금은 자기를 표현하세요.”

 

우리가 배우는 것은 아름다운일이지만 배우는 것이 습관이 되면 자기표현에 장애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표현해 놓은 것, 언제까지 다른 사람이 표현해 놓은 것만 습득하면서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냐.

 

어느 순간에는 배우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된다. 배우는 것은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되어야 한다.

 

우리가 배우고 습득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것이 자기한테 표현의 동력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배움은 한 쪽에 사는 것이다.

 

자기가 경계를 모두 품는 것이 아니라 들을 때는 말하는 동력이 있어야 하고 배울 때는 표현의 동력이 있어야 하고, 읽을 때는 쓰는 동력이 있어야 한다.

 

자기의 활동은 듣기와 말하기의 사이에 있어야 하고 배우기와 표현하기 사이에 있어야 하고 읽기와 쓰기의 사이에 있어야 한다.

 

이 사이에 있을 때 인간은 순수해지지 않고 점잖해 지지 않고 거칠어집니다. 눈빛이 야성이 돌아요. 짐승의 눈빛을 회복한다.

 

배우는 데 온 자기의 삶 전체를 배우는 데 바치고, 자기의 삶 전체를 누가 말하는 정리하는 데 바치고, 자기 삶 전체를 다른 사람이 하는 말 듣는데 바친다면 자기의 삶은 도대체 자기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자기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자기는 경계에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말할 때 그 말을 듣는 순간 자기 안에는 경계성을 회복하는 야성이 죽지 않고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 내가 어떻게 쓸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읽어야한다.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은 자기가 어느 한 쪽에 수동적으로 갇힌 다는 게 아니라 항상 자기가 경계에 서서 자기가 자기로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살아 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성에 제어되지 않고 욕망의 주인이 된 다는 것이고 이념의 수행자가 아니라 욕망의 실행자가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을 표현하려는 사람이다. 삶의 궁극적인 동력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결국에 뭐냐 나를 표현하는 것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를 침해 하는 어떤 것에도 도전해야 한다. 때로는 그것이 거칠 수 도 있지만 나의 주체성, 존재성, 존엄을 침해하는 것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죽기 전까지 해서는 안 될 두 가지는 첫째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지 않기 둘째 남의 충고를 듣지 않기 그래서 나로 살기로 한다.

 

죽기 전까지 버려서는 안 될 두 가지는 첫째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 둘째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사랑을 버려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만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합니다.

 

왜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를 항상 내적 자발성에서 생산되는 기준에 의존하지 않고 항상 자기 밖에 이미 생산된 기준에 견주어 보기 때문이다.

 

왜 자기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보잘 것 없어 보이기 때문 그렇다. 자기가 나빠 보이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

 

한 번 자기 멋대로 살아간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여러분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 있고 강한지 자유로운 존재인지 확인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