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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우의 팝 컬처] "너희 늙어봤어? 난 젊어봤다"

물조아 2011. 9. 2. 11:08

한현우 기획취재부 차장 / 노인에 대한 배려 없는 젊은이 위주 영화관 비싼 VIP 티켓 사들고 공연장 찾아도 시장바닥 같은 분위기에 하염없이 줄서 기다려 입장 장·노년층 문화 소외시키면 선진국 될 수 없어

 

어디서 읽었던가 들었던가.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에게 "너희 늙어봤어? 나는 젊어봤다!"고 일갈(一喝)했다고 해서 '그것참 말 된다'고 생각했었다. 고대 상형문자를 해석해 봤더니 "요즘 젊은 것들은…"으로 시작하는 노인들의 푸념이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유의 얘기도 있다.

 

젊어본 사람만이 늙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늙은 사람은 한때 젊었다. 늙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진실을 끝내 실감하지 못한다. 그런데 요즘 세상 전체가 모든 이를 젊다고 간주하고 돌아가는 것 같다.

 

여든을 눈앞에 두신 아버지가 영화 '고지전'을 보고 싶어하셨다. 지난번에 보여드린 영화가 '태극기 휘날리며'였으니 아버지의 영화관 나들이는 무려 7년 만의 일이었다. 젊어서 서부영화와 전쟁영화를 꽤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영화관에 잘 안 가시는 이유로 "볼 만한 영화도 없는 것 같고, 요즘 극장은 너무 복잡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요즘 영화로는 드물게 '고지전'이 신문에 광고를 내서 아버지의 눈길을 끈 것이다.

 

아버지와 친구분을 대형 멀티플렉스에 모셔다 드렸다. 백화점과 대형마트와 영화관이 한 건물에 있는 복잡한 곳에서 아무래도 두 분이 고생하실 것 같았다. 좌석 배치도를 보며 '4관 L열 17번, 18번'을 설명해 드리고 "영화 끝나면 모시러 올 테니 반드시 이 매점 앞으로 와서 기다리시라"고 했다. 마실 것을 사 드리려 했더니 두 분이 드실 만한 건 '딸기 스무디'뿐이었다.

 

빳빳하게 다린 모시 셔츠에 양복바지까지 갖춰 입은 두 분이 반바지에 슬리퍼 신은 젊은이들과 함께 영화관 안으로 사라질 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짜리 딸을 들여보내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 됐다.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이 다른 영화관에서 두 분이 당황하지는 않을까, 주말의 복잡한 영화관 로비에서 두 분을 찾기 어렵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그것은 기우(杞憂)였다. 영화 끝날 시각에 맞춰 영화관 로비에 가보니, 북적대는 그곳에 두 분만 꼼짝 않고 섬처럼 서 계셨다. 얼굴은 "분명히 여기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하는 표정으로 약간 상기돼 있었다. 그 얼굴은 언젠가 딸과 함께 대형마트에 갔다가 "금방 올 테니 여기 꼼짝 말고 있어" 하고 화장실에 다녀왔을 때 본 딸의 얼굴과 흡사했다. 나는 내가 젊다는 사실이 죄송스러워서, 하마터면 울 뻔했다.

 

나는 아버지께 컴퓨터 가르쳐드리는 일을 거의 포기했다. "마우스 화살표를 여기에 놓고 왼쪽 버튼을 클릭하세요" "하드디스크는 C와 D가 있는데 C 안에 폴더를 만들어서 늘 거기에 저장하세요" "잘못 쓴 글자는 딜리트를 눌러 지우고, 줄을 바꾸려면 엔터를 치세요" 하고 말씀드리면, 아버지는 그 요령보다 문장 속 단어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시는 것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왜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전쟁에 참전하고, 독재 정권과 민주화 시대를 거쳐 인생 황혼에 이른 아버지가 아직도 세상에 맞춰 사셔야 하는가. 세상이 아버지 세대에게 더 잘하고 편하게 해 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 영화관엔 노약자 전용 카운터와 안내원이 있어야 하고, 컴퓨터는 국가에서 미리 가르쳐 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

 

좀 다른 경우지만, 이런 일은 공연장에서도 볼 수 있다. 왕년에 유명했던 해외 뮤지션이 한국을 찾아오는 일이 잦아지면서, 장·노년층 관객이 꽤 늘었다. 작년에 온 밥 딜런이나 올해 열린 이글스의 내한 공연이 그랬다. 50대 후반에서 60대 중반의 신사들이 꽤 좋은 승용차를 타고 공연장인 올림픽체조경기장에 도착했다. 이들 상당수가 최고 33만원짜리 VIP 티켓을 사서 모처럼 '젊은 날의 우상(偶像)'을 보러 공연장에 왔다.

 

그런데 난생처음 온 공연장은 시장 바닥과 비슷했다. 하염없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렸고, 들어가보니 공연을 기다리며 앉아서 쉬거나 차를 마실 만한 공간이 전무(全無)했다. 화장실마다 20m씩 줄이 서 있었다. 당시 공연장을 찾았던 이모(62)씨는 "VIP 티켓을 사고도 이렇게 푸대접받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이라고 푸념했다.

 

영화관이나 공연장은 대개 민간 영역이니, 그들이 주 고객인 젊은 세대 위주로 운영하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장·노년층을 문화에서 소외시키는 나라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모든 세대가 불편하지 않게 문화를 즐길 수 있어야 살기 좋은 나라다.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너무 자괴(自愧)하지 말 일이다. 젊고 늙음은 사실 매우 상대적인 것 아닌가. 한 노인이 산에 갔다가 펄쩍펄쩍 뛰며 산을 오르는 젊은이 무리를 보고 "좋~을 때다"라고 혼잣말을 했다. 한 발 두 발 정상에 올라가니 1000년 묵은 주목(朱木)이 그 노인을 굽어보며 말했다. "좋~을 때다."

 

사진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