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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 생명권보다 피해자 생명권이 더 중요"

물조아 2010. 2. 26. 08:05

[조선일보] 이명진 기자 mjlee@chosun.com 14년 만에 다시 "사형제 합헌" 결정 배경

 

● 왜 합헌인가 국민 법 감정상 필요악으로서의 사형제는 여전히 필요

● 위헌 의견은 왜… 법에 의한 생명 박탈은 형벌 목적 뛰어넘는 과도한 처벌

● 보충 의견은 무슨 의미 현행 사형제 운용에 문제 사형 규정한 법 조항 축소할 필요 있어

 

지난 1996년 11월 헌법재판소는 사형제도를 합헌이라고 결정할 때, "사형이란 형벌은 무엇보다 고귀한 인간의 생명을 국가가 법의 이름으로 빼앗는 제도살인(制度殺人)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다"면서도 "인간의 본능적 공포심과 범죄에 대한 응보(應報) 욕구가 맞물려 고안된 '필요악'으로서 불가피하게 선택된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헌재는 "우리 문화수준이나 사회현실로 미루어 당장 무효화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시기상조론'을 제기하면서도, "사형이 가진 범죄예방 필요성이 없게 된다거나 국민의 법감정이 사형 존속의 필요가 없다고 인식하는 시기에 이르면 곧바로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

 

그로부터 14년 만인 25일 나온 또 한번의 사형제 합헌 결정은, 범죄예방이나 응보주의 실현을 통한 정의와 공익달성 등 '필요악'으로서의 사형제는 여전히 그 기능을 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사형폐지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면서,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이 1996년엔 2명에서 이번엔 4명으로 늘었지만 일반 국민의 법감정이나 살인 등 극악한 범죄에 응당한 처벌로서의 사형제도는 아직 폐기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의 한 여론조사에선 국민 3명 가운데 2명이 사형제를 존속해야 한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법률적으로는 헌법 110조 4항에 '군사재판에서의 사형을 선고한 경우'라고 돼 있기 때문에 헌법에 적혀 있는 사형제도가 위헌이라고 판단한다면 헌재 스스로 헌법을 개정하거나 변질시키게 된다(이강국 헌재소장 보충의견)고 헌재는 밝혔다. 

 

사진: ▲ 헌재 재판관들은 사형제 위헌 심판사건을 심리하면서 작년 11월 사형문제를 다룬 영화 ‘집행자’를 단체 관람했다. ‘집행자’는 사형을 직접 집행하는 교도관의 시각에서 사형제의 문제와 의미를 그려낸 영화다. 사진은 ‘집행자’의 한 장면.

 

◆생명권 VS. 생명권

 

사형제 존폐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생명권 보장'의 문제다.

 

헌재 스스로도 결정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생명권은 헌법에 명문화(明文化)된 것은 아니지만,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인간 기본권의 바탕이 되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다.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사형수의 생명을 박탈하는 사형이라는 극단적인 형벌은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은 법률로도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한 헌법 37조 2항 위반이며, 교화(敎化)와 범죄 예방이라는 형벌의 목적을 뛰어넘는 과도한 처벌이라고 본 것이다. 위헌 의견은 또 사형은 오판(誤判)으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을 차단할 수 없다고도 지적했다.

 

 

하지만 다수의견인 합헌론은 사형수의 생명권이 소중한 만큼 피해자의 생명권도 중요하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책무를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국가의 역할 역시 중시해야 한다고 봤다.

 

사형수의 생명권과 피해자 또는 잠재적 피해자의 생명권이 충돌하게 될 경우, 국가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형수의 생명권을 제약하는 것은 "공익적인 목적에 따른 정의의 실현이며 기본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헌재는 이와 관련해 "사형은 인도적인 측면에서 비판받기도 했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형벌의 하나로 범죄에 대한 근원적인 응보방법이며 효과적인 예방법"이라며 "우리나라에서도 고대(고조선)의 기자(箕子) 8조금법에 상살자 이사상(相殺者 以死償·사람을 죽인 자는 죽음으로써 갚는다)이라는 조문이 있었다"고 결정문에 적기도 했다.

 

 

◆헌재 "사형제 존폐, 입법의 문제"

 

이번 헌재 결정은 사형이라는 형벌제도의 헌법적 정당성을 확인한 것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헌재가 사형제 존속과 폐지 가운데 어느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린 것은 아니라고 헌재 관계자는 밝혔다.

 

법조계는 재판관 9명 가운데 위헌 의견 4명과 합헌 의견 2명 등 6명이, '사형제 합헌'이라는 결론과는 별개로 현행 사형제도의 운용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점을 의미있게 받아들이고 있다.

 

합헌 의견을 낸 민형기 재판관은 "사형 대상 범죄를 축소해야 한다"고 했고, 송두환 재판관은 "사형 존폐문제는 국민의 선택과 결단을 통해 입법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당장 위헌 의견대로 사형을 종신형으로 대체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할지라도, 사형을 규정한 법조항을 줄이는 등의 법 정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990년 이전엔 뇌물죄도 사형선고가 가능했고, 1996년엔 89개 법조항이 사형을 법정형으로 포함했다가 현재는 78개 법조항에 남아있다. 법조계에선 만약 헌재가 사형제도 자체가 아니라 개별 법률에 적용된 사형이 적절하냐의 문제를 따진다면 경우에 따라 위헌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고 전망한다. 실제 헌재는 '상관 살해'를 반드시 사형으로만 처벌하게 했던 군형법 조항은 위헌이라고 결정했었다.

 

헌재에 따르면 2008년 현재 독일·프랑스 등 92개국이 사형제도를 폐지했으며, 존치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일본 등 78개국이다. 한국은 1997년 12월 이후 사형집행이 중단돼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된다. 현재 교정시설에는 사형이 확정된 사형수 57명이 수감돼 있다고 법무부는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