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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박정희가 다른 나라 대통령이었다면…” [중앙일보]

물조아 2009. 10. 20. 06:15

한국 현대사 영원한‘키워드’, 박정희 30주기 국제학술대회

 

올해는 박정희(1917~79) 대통령 서거 30주기. 그의 비극적 죽음 이후 꼬박 한 세대가 지났지만, 그는 현실 정치 속에 살아 있다. 한국사회는 21세기에 들어서도 위기의 국면마다 죽은 그를 불러낸다. 박정희와 그의 유산은 아직도 이념 논쟁의 핵이다. 박정희 시대에 대해 저마다 ‘뜨거운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학문적 재조명이 더 어렵다. 날선 정치적·이념적 대립 속에 박정희는 사후 30년이 지나도 자신의 역사적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19일 ‘박정희와 그의 유산:30년 후의 재검토’ 국제학술대회가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동아시아협력센터와 호주국립대 한국학연구원의 공동 주최로 열렸다. 한국·호주·영국·미국의 학자 13명이 모여 박정희 시대의 ▶리더십 ▶정치와 경제발전 ▶사회와 문화 등 3개 영역에 걸쳐 9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을 벌였다.


◆박정희 없는 다른 세상 꿈꾸기?=박정희 없는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을까? 그 없이도 한국은 지금의 모습대로일까. 더 높은 성장과 더 많은 분배를 달성한 선진화된 서구형 복지국가가 됐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아니면 박정희 없는 한국은 ‘악몽’ 그 자체였을까.


학문적 질문은 아니지만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의문이다. 폴 허치크로프트 호주국립대 교수는 재미있는 가정을 했다. “만약 60년대 한국에 박정희가 아닌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집권 1965~86)와 같은 인물이 집권했더라면 어땠을까?” 필리핀은 한국과 달리 능력 위주의 엘리트주의, 강력한 관료제의 전통이 없었다. 이는 일제 식민지 유산이라 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허치크로프트 교수는 “아마도 ‘한국의 마르코스’는 이승만 시대에 잘 다져진 중앙집권적 국가기관을 개인적 치부를 위해 이용하길 즐겼을 것”이라고 했다. 반대로 유력 가문에 의해 분점된 권력구조를 갖는 필리핀에선 설령 박정희와 같은 인물이 나타났더라도 고전했을 거란 견해다.


그렇다면 인도네시아에 수하르토(집권 1965~98) 대신 박정희와 같은 인물이 나타났다면? ‘인도네시아의 박정희’는 비교적 잘 정비된 관료제도와 산유국이란 축복을 국가개발에 최대한 활용했을 거란 추측이다.


임혁백 고려대 교수는 “박정희는 효율적인 산업화를 위해 독재체제를 구축한 게 아니라, 권위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해 산업화를 꾀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정희 시대 고도 성장은 개발 독재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니라, 독재에도 불구하고 가능했다는 견해다. 당시 한국사회는 전쟁과 토지개혁으로 인해 산업화에 저항할 만큼 강력한 지주계급이 없었다. 굳이 권위주의 통치로 ‘산업화 저항세력’을 통제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개발 독재 없이도 고도의 경제성장은 성취될 수 있는 것이었다며 전후 핀란드·오스트리아·일본의 사례를 들었다.


◆역사의 라이벌…박정희와 김일성=박정희와 김일성은 60~70년대 남북한 체제경쟁을 지휘하면서 한국사에 보기 드문 ‘라이벌’ 관계를 이룬다. 하지만 그 역사적 대결은 김일성의 처참한 패배로 귀결됐다. 박정희가 권력을 장악한 61년 남한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82달러로 북한의 195달러에 비해 절반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79년 박정희 사망 때 남한의 1인당 GNP는 1640달러로 1114달러의 북한을 훌쩍 따돌렸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남한은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요소가 남아 있었던 반면 북한은 어떠한 내부적 도전도 용납하지 않은 사회”라며 “박정희는 남한 내부의 민주주의적 도전에 경제적 성과로 응수했으며, 이러한 남한 내 경쟁이 결국 휴전선을 넘어 북한까지 압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남한은 경제 성과를 놓고 ‘실용주의적 경쟁’을 벌였으나, 북한은 항일 투쟁이나 민족 주체성을 명분으로 ‘도덕주의적 경쟁’에 매몰돼 패배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 ‘정신적 유산’도 주목해야=박정희 시대의 물질적 유산뿐 아니라 정신적 유산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는 박정희 시대 ‘할 수 있다(Can Do)’ 캠페인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식민 통치를 겪으며 심화된 패배주의는 한국민의 ‘민족성’으로 숙명론, 심지어 ‘거지근성’까지 거론되게 할 정도였다. 4·19혁명을 이루고도 장면 정권에 대한 실망 속에서 민족성 개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러한 자기비하적 ‘민족성’에 대한 개탄은 함석헌·장준하 등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도 공통된 현상이었다.


김 교수는 “박정희는 전략적으로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사상을 쿠데타 합리화에 동원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정신은 박정희의 주요한 정치적 반대자였던 함석헌이 줄곧 강조했던 것이었다. 박정희는 이를 ‘조국 근대화’ 프로젝트에 활용하면서 한국민의 패배주의적 심성을 일변시켰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60~70년대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굳힌 ‘캔 두어스(Can Doers)’의 출현은 산업화를 넘어 남한 사회 민주화의 동력이 됐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배노필 기자 사진: 제7대 대통령 선거(1971년 4월 27일)를 앞두고 4월 24일 부산에서 선거유세를 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겸 공화당 후보. 박 대통령은 이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근소한 표차로 이겼다. 이듬해 10월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한 ‘유신체제’가 선포됐다. [중앙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