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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잘하세요” 똥폼 잡는 속물들에 날리는 ‘한 방’

물조아 2009. 5. 8. 06:16

[중앙일보] 홍상수 감독 새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49) 감독, 제목 하나는 확실히 잘 짓는다. 부조리한 이미지가 떠오르는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느닷없는 즉흥성이 느껴지는 ‘강원도의 힘’,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는 명대사가 나온 ‘생활의 발견’ 이 그렇다. 최근 전주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을 통해 선보인 ‘첩첩산중’은 또 어떤가. 이번 영화 속 대사를 빌려 말하자면 “딱 자기 영화 같은” 제목이다. 그의 9번째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그중 발랄하기가 일품이다. 어쩐지 실소가 나오는 제목처럼, 역대 홍상수 영화 중 가장 유머러스하고 코믹하다. 심지어 귀엽기도 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영화의 엔딩 부분, 상대의 결혼 생활에 대해 참견하려는 주인공 영화감독 구경남(김태우)에게 상대 여자 고순(고현정)이 날리는 대사이기도 하다. 우리는 얼마나 종종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인생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거나, 무릇 인생이나 영화는 이러저러 해야 한다고 개똥철학을 설파하는가. 홍상수는 이처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똥폼’잡으며 인생사를 다 아는 양하는 세속의 허세에 날렵한 펀치를 날리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귀여움에 꽂힌 감독의 변화=예술영화감독 구경남은 제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초청받는다. 그러나 심사는 뒷전이고, 평론가가 던진 한두 마디 상찬에 취해 우쭐해하거나 후배 감독의 성공을 질시하며 ‘이번 작품은 꼭 200만이 들어야 한다’고 속말을 하기도 한다. 오랫만에 만난 후배(공형진)의 아내(정유미)에게 성적 환상을 품었다가 된서리를 맞은 그는 제주도로 날아간다. 자신의 영화처럼 대중과 소통안되는 특강을 하던 그는, 대학시절 좋아했던 고순(고현정)이 노 선배 화가(문창길)의 여자가 돼있다는데 배신감을 느낀다.


영화는 홍상수 영화 특유의 반복, 대구 구조를 따른다. 특별한 사건없이 늘 어디론가 떠나고, 누군가 만나고, 밥먹고 술마시고 성적으로 추근대며 우연성이 반복되는 일상사가 펼쳐진다. 연기와 연출의 즉흥성도 여전하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이어 세번째로 함께 작업한 김태우는 “두 공간에서 벌어지는 얘기라는 것 외에는 모르고 촬영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은 허세, 자기애, 속물근성 등을 바라보는 감독의 한결 부드러워진 시선. 지식인적 가학에 가까운 평소의 조소가, 한 여름 제천과 제주도의 따뜻한 풍광과 함께 무장해제됐다. 감독 역시 “인간들이 사는 모습이 재밌고 귀엽지 않냐”며 웃었다. “예쁜 건 금방 변하지만 귀여운 건 변하지 않는다. 귀엽다는 건 굉장한 애정표현”이란 말도 덧붙였다. 자학적인 유머 감각에 어느덧 관조의 시선이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홍상수식 작업모델=평소 제작비의 1/10(약 2억원)로 규모를 줄인 영화는, 예술영화의 제작환경 악화 속에서도 매년 신작을 내놓고 있는 홍상수식 작업모델을 보여주기도 한다. 13명 초미니 스태프가 참여한 이번 영화에는 김태우·고현정·하정우·정유미·공형진·유준상 등 스타배우들이 노 개런티로 참여해, 홍상수영화의 생존을 위한 확실한 지지의사도 밝혔다. 소설가 김연수가 극중 소설가 출신의 바람둥이 감독으로 깜짝 출연했다.


“짝만 찾으면 인생은 만사형통”이란 대사(‘오! 수정’),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왜 해요”라며 갑자기 역정내는 여자(’강원도의 힘’) 등 다른 홍상수 영화의 흔적들을 찾는 것도 특별한 재미거리. 현장에서 대본쓰고 촬영하는 홍상수의 작업 스타일에 대해 김태우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사는 것과 같다. 대본 받고 바로바로 진짜처럼 하는 것들이 쌓이는 거라, 보통 때의 캐릭터 구축은 없다. 그냥 어제 살았던 거, 그제 살았던 거, 그 연장선상으로 사는 데 집중한다”고 말했다.14일 개봉. 제62회 칸영화제 감독주간 초청작. 양성희 기자


사진: 예술영화감독 구경남(김태우)이 제천과 제주도에서 겪는 해프닝을 통해 속된 욕망과 허위의식을 코믹하게 풍자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온 구경남은 정작 심사에는 관심도 없고, 딴짓에 열중한다. 소설가 김연수씨(왼쪽에서 세번째)가 문인 출신의 바람둥이 속물 감독으로 깜짝 출연했다. [스폰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