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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에 빠진 대한민국, 때와 장소 남녀노소 안 가리고 입에 달고 살아

물조아 2009. 1. 30. 09:01

품격 잃은 정치인·방송·인터넷·영화가 부추겨, 방송 언어 '가이드라인' 세워야


"그 오빠 봤어? 씨○, ○나 잘생겼어. 완전 쩐다, 쩔어"(중 2 소녀), "씨○, 늙은 주제에 어디서 대통령 하겠다고 지○이야, ○발"(대선 후보의 미니 홈페이지에 올린 초등생의 글), "개○○"(KBS2 '상상플러스'의 신정환)….


말이 썩고 있다. 초등학생부터 연예인·정치인까지 나이·성별을 초월한 '언어 대중'이 막말을 입에 달고 산다. 막말은 불량학생이나 조폭 등 특정 집단의 언어가 아닌, 국민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일상의 언어가 되고 있다.


◆TV와 인터넷은 '막말 가정교사'


초등학교 교사 정연주씨는 아이들 일기장 검사를 할 때마다 깜짝 놀란다. "상황을 묘사하면서 '열라', '○나' 같은 표현을 너무 많이 써요." 그는 "이 말이 원래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는 아이들이 더 많다"고 했다.


아이들이 주고받는 문자메시지는 더 가관이다. '대○빡 ○낸 크쎔'(머리 크다) 식이다. '뭥미'(대체 뭐야?), 뷁(불쾌함), '쩐다'(좋다, 혹은 나쁘다) 등 인터넷의 '외계어'(정체 불명의 말)를 사용해서 자극적인 댓글을 쓰거나 보는 데 익숙해진 아이들에게 '정상적인 언어'는 더 이상 그들이 쓸 말이 아니다.


아이들이 이런 말을 배우는 곳은 물론 TV와 인터넷이다. 요즘 인터넷의 인기 검색어 중 하나는 '연예인 막말'이다. 최근엔 국내 최고 인기가수 이효리씨가 방송에서 "○라 좋아"라는 말을 썼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해당 방송사에서는 "성문분석 결과 '좀 더'로 밝혀졌다"고 했지만,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막말하면 뜬다"는 게 방송가의 새로운 규칙이다.


온 가족이 즐겨보는 '무한도전'(MBC) '1박2일'(KBS2) '패밀리가 떴다'(SBS)등 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 쇼'는 반말·비속어·은어의 교과서다. 이런 프로그램에서는 '예의' 말고는 모든 게 허용된다. 연예인끼리 '야, 너'는 기본이고, '(하)찮은이형' '쓸모 없는 인간' '그것도 재주랍시고' 식의 비하하는 말, "닥쳐" "이 자식아"도 예사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개○○' '죽어라' '여자들 너무 날로 먹는다' 같은 저질 말이 수십 개씩 쏟아진다. MBC '명랑히어로'는 지난해 10월 2회 방송 분에서 무려 280회(방송통신위 집계)의 반말과 비속어를 썼다. 이런 비속어는 '자막'처리로 효과가 배가된다.


◆흥행의 지름길 '막말, 불륜, 패륜'


'금기'를 넘어선 건 드라마가 먼저였다. 2003년 '패륜·엽기 드라마'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인어아가씨'(MBC)는 "야, 이○아, 그래 오늘 쌩쑈 한번 해보자" 같은 대사에 병을 깨서 자해하는 장면이 소상히 방영됐다. 여성들의 난투극·육박전(SBS '내 남자의 여자')을 넘어, 온 식구가 불륜을 저지르는 드라마(SBS '조강지처클럽'), 불륜 남편이 아내를 익사시키는 드라마(SBS '아내의 유혹')는 '막장 드라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시청자들은 좋지 않은 걸 알면서도 자꾸 빠져드는 이른바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죄악의 기쁨)'에 빠졌고, 이런 드라마는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방송사, 방송통신위 '심의'는 허술


10년 전만 해도 공중파 영화에 '개○○'라는 단어가 나오면 '효과음'으로 처리됐고, 욕설이 많이 나온 영화 '친구'(2002)는 방송용으로 더빙을 새로 했다. 요즘은 다르다. SBS 영화팀은 "최근 몇년 사이엔 정황상 과하지 않으면 그 정도 욕설은 허용하는 편"이라고 밝혔다. 방송통신위원회 심의 기능도 '막말'엔 역부족이다. '방송언어'에 관한 심의 규정은 '국민의 바른 언어생활에 이바지하여야 한다', '바른 언어생활을 해치는 억양·어조·은어·유행어·조어·반말을 사용하여서는 안된다' 가 고작이다.


◆막말, '현실 언어'가 되다


막말은 '막말 정서'를 낳고, 막말 정서는 또 극한 행동으로 이어진다. "결사반대" "웬말이냐" "규탄한다"가 주류였던 시위현장의 용어는 최근 몇 년 새 급격히 과격화됐다. '부시를 묻어 버리자'(파병반대시위), '쥐새끼 너 즐쳐먹어'(촛불시위의 초등생) 같은 플래카드도 나왔다.


최윤식 연세대 인간행동연구소 연구원은 "막말이 거친 행동으로 이어지는 건 당연하다. 말은 행동을 일으키는 생각의 반응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타락한 언어의 제국' 누가 책임지나


2000년 신문지상에, TV 광고에 만화 주인공 '졸라맨'('○나게'라는 욕설에서 유래)이 등장한 후 비속어는 급속히 퍼졌고, 휴대전화가 보편화되면서 '○나게 재미있다' '○라 힘들다' 같은 말은 일상이 됐다. 거실에 놓인 전화로는 감히 할 수 없었던 말이다. 문화조류와 미디어 발전이 언어 타락을 부추긴 것이다.


'정치인의 입'은 더 결정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직 시 '깽판' '조진다' '떡됐다' 같은 말을 사용함으로써, '지도자의 언어'를 거리의 언어로 격하시켰다. 다른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2월 국회파행 당시 의원들끼리 "밀지 마, 이 ○○야", "너 이 ○○!"라고 욕하는 장면은 그대로 노출됐다. 하지현 건국대병원 정신과 교수는 "막말에 익숙해진 대중은 TV를 핑계 삼아 점점 더 강한, 더 많은 자극을 원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그렇다면 '막말 나라'는 대체 어디부터,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 김종성 방통위 지상파 심의부장은 "과거 방송위원회는 심의 보다는 정책·행정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막말 제어 기능이 약했다"며 "앞으로 방송에 대한 언어 심의기능을 강화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경우 지상파 공영 방송은 언어 및 사회규범에 관한 한 '완고한 기준'을 세우고 지켜가고 있다.


핵가족화 되면서 잃어버린 '가족 내 질서'의 회복도 시급하다. 중장년층 스스로 타락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어린이들에게 바른 언어를 사용하라고 권할 처지도 능력도 안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국가적으로는 미디어에 노출되는 유아기에서부터 한창 감수성을 키워가는 초·중·고 나이층에 이르기까지 언어 교육에 관한 분명한 가이드 라인을 세우는 것을 고려해야 할 시점이다. 조선일보 박은주 엔터테인먼트부 부장 사진 일러스트=정인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