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책(冊)

라즈니쉬 명상집 ‘삶은 가장 큰 웃음이다.’

물조아 2008. 10. 20. 20:16

 

B.S 오쇼 라즈니쉬 지음/김춘수 엮음/백암(도서출판)


너는 놀랄 것이다. ‘현재’에 불행한 사람을 나는 본적이 없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 자신이 몹시 불행하다고 말한다. 나는 눈을 감고 ‘바로 지금’ 그가 불행한지 생각해 보라고 하자.


그들은 잠시 후 눈을 뜨고 “지금 이순간은 불행하지 않습니다.” 이 순간에 불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럴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다.


노자는 “~ 그리고 모든 것이 자연 그대로 행해지도록 하라.” 장자는 “단 하나의 가치 있는 개성은 ‘무아(無我)’이다.”


○ 자유는 그대가 살아가면서 행한 모든 선택이 축적된 결과인 것이다. 자유는 그대 내면에서 하나의 힘이 된다. 자유는 신이 준 최대의 선물이다.


삶은 가장 큰 웃음이다. 당신이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당신은 실체 또한 볼 수 없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면 그만큼 실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된다. 실체는 오직 텅 비어 있는 아무것도 끼어 있지 않은 순수한 눈에 의해서만 보여 지기 때문이다.


당신 스스로 당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때 당신의 모든 지식과 경험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자기 자신의 자각이 없다면 어떠한 지식도 진정한 지식이 될 수 없다.


당신이 깨달음을 얻을 때 모든 영상과 판단이 사라진다. 더 이상 그 무엇도 필요 없는 순수한 상태가 된다. 마음은 사라지고 오직 순수한 의식만이 남는다.


기억하라. 어떤 상황에 부딪치면 행동하라.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생각하면 그 상황이 당신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한 순간을 놓치면 당신은 모든 것을 놓친 것이다.


나에게는 하느님은 ‘지금 여기’를 뜻한다. 당신이 보는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속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속안에 존재하신다. 절대로 피조물과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하느님을 믿지 말라.


삶은 어디에서도 끝나지 않으며 어디에서도 시작되지 않는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은 영원하고 끝없는 과정을 알게 된다. 죽음은 신이라고 죽음은 단지 휴식이 아니라 변화이며 새로운 생명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것이다.


○ 노자는 “추구하라, 그러면 잃을 것이다. 구하지 말라, 그러면 그 즉시로 발견할 것이다.”


이 세상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 창조주는 자신의 창조물에 존재한다. 신은 단지 하나의 창조적인 힘이다. 그는 창조성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날 때 거기에 신이 존재한다. 그대의 눈으로 아름다움을 볼 때 거기에 신이 존재한다.


그대는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붓다가 되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가 되려고 한다. 이제 그대는 결코 그대 자신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항상 불행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을 때 그대는 알려질 수 있는 모든 것, 또는 알려질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안다 해도 그 지식들은 단지 쓰레기 같은 것이 될 뿐이다.


지식은 무지를 감출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없앨 수는 없다. 지식은 결코 앞의 내적인 눈을 열어주지 못한다. 그대는 전체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앎으로써 전체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무엇을 믿든 단지 믿기만 하지 말고 그것을 신성하게 하라. 단지 머릿속에서 하는 지적인 믿음으로 남겨 두지 말고 그것이 곧 존재가 되게 하라. 그러면 그것은 신성해진다.


믿음은 그것이 오직 생각일 뿐이라면 아무런 쓸모도 없다. 그것이 그대의 피와 뼈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도 없다. 무엇인가가 진실이라고 느낀다면 그렇게 살아라. 진실 된 삶을 살아라.


그것만이 그대가 그것을 진리라고 느끼고 있다는 증명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 이외의 다른 증명은 없다. 오직 그대의 삶만이 그대의 믿음에 대한 유일한 증명이다.


피타고라스는 두 가지 법칙을 말한다. 하나는 ‘욕구의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힘의 법칙’이다. 욕구의 법칙은 깨어있지 못한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기계적으로 사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욕구의 법칙에 따라 살고 있다.


그대가 더 깨어 있을수록 그대는 점점 더 욕구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 힘의 법칙 속에서 살기 시작한다. 육체는 욕구의 법칙을 따르고 영혼은 힘의 법칙을 따른다. 마음은 욕구의 법칙을 따르고 가슴은 힘의 법칙을 따른다.


당신은 책을 읽는다고 해서 지식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란 그대 자신을 다스림을 의미하고 속박이란 그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함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존경하지 못한다면 자신을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무의식이 바로 악이다.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바로 악이다. 그렇다면 선은 무엇인가? 의식적으로 깨어 있으면서 행동하는 것, 바로 그것이 선이다.


○ 당신은 어느 누구도 아니다. 앎은 현재에서 일어난다. 지식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진실은 그것을 증명한 논법이 없다. 그것은 진술이며 기억될 뿐이다.


달마대사는 “~ 나는 아무것도 당신들에게 깨닫게 할 것이 없다. 나는 다만 진실을 터무니없는 진술로 보여줄 뿐이다.”


쉬리 마마나는 제자들에게 오직 한 가지만을 명상하라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당신이 무가 되는 날, 당신은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안다. 당신은 바로 무다.


○ 삶은 불확실하다. 매순간 너는 불확실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삶은 도박이다. 진정한 혁명가는 사회에 순종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다. 진정한 혁명가는 오직 자신이 이해하는 바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사회를 역류하든 사회의 편이 되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해에 따라서 산다.


노자는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망설이며, 살면서 부단히 변모한다. 또한 나는 결코 미리 결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 순간이 오면 그때 바로 결정한다.”


실수를 반복하지 마라.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새로운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은 부단히 성숙해간다. 그것이 배움의 유일한 길이다.


삶은 죽음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네가 진정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너는 끊임없이 진정하게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네가 죽음을 사랑할 수 있다면 삶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간단할 것이다.


종교적 인간이라 불리는 90%의 사람들은 미숙한 인간이다. 그들이 종교를 믿는 것은 그들은 신앙 없이는 살수 없기 때문이다. 금세기에 들어 많은 사람들이 비종교적으로 되었다. 그 이유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 아니라 단지 이 시대가 사람들을 조금 더 성숙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을 때 그가 의미했던 것은? 죽은 것은 신이 아니라 미숙한 심성의 소유자가 갖고 있던 신이었다. 신은 결코 살아 있었던 적이 없으므로 사실 신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신앙은 네가 “나는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라고 말 할 수 있게 해준다.


제자들이 랍비 이스라엘에게 물었다. “말해 주십시오. 랍비여, 어떻게 신을 섬겨야 합니까?” 그는 그 질문에 놀라 대답했다.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신을 섬기는 방법? 너희들은 너무나 커다란 질문을 하는 구나, 나는 그것을 대답할 만한 자격이 없다.”


모든 위대한 마스터들은 이야기나 비유나 일화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말하면, 많은 것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표현은 너무나 미숙하여 원시적이고 천하고 추하다. 비유는 대상을 매우 부드럽게 한다. 끝. '10.10.13  201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