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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중앙일보]

물조아 2010. 3. 6. 11:17

# 밴쿠버 겨울올림픽이 끝난 지 일주일이 돼가지만 김연아는 여전히 화제의 중심에 있다. 그녀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 어떤 시시콜콜한 이야기일지라도 사람들 입에 회자(膾炙)된다. 이런 가운데 그녀의 좌우명 또한 화제다. 말인즉 “이 또한 지나가리라!”

 

# 본래 이 말은 유대경전 주석서인 『미드라쉬(Midrash)』의 ‘다윗왕의 반지’에서 나왔다. 다윗왕이 어느 날 궁중의 세공인을 불러 명했다. “날 위해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되 거기에 내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환호할 때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 결코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으라.” 이에 세공인은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지만, 정작 거기에 새길 글귀가 떠오르지 않아 고민 끝에 지혜롭기로 소문난 솔로몬 왕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이때 왕자가 일러준 글귀인즉 “이 또한 지나가리라!”

 

#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승리에 오만해지지 않기 위해 다윗왕이 자신의 반지에 새겨 넣고 몸에 지녔다는 이 말을 좌우명 삼아 김연아는 그 모진 훈련을 견뎌내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세계 정상에 올랐음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받은 그 모든 황홀한 찬사도 순간 덧없이 지나가리라는 것을 지혜로운 그녀는 알아야만 한다. 결국 권력도 명예도 부도 사랑도, 실패와 치욕과 가난과 증오도 모두 “이 또한 지나가리라!”

 

# 사실 이것은 비단 김연아만의 좌우명이 아니다. 골프여제 박세리도, 메이저리거 박찬호도 이 말을 되뇌며 슬럼프를 극복하고 나아갔다. 하지만 이 말이 운동선수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삶의 신맛, 짠맛, 쓴맛, 단맛을 다 맛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몸으로 깨닫고 가슴과 뇌리에 이렇게 새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 이강숙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의 부인 문희자 선생이 동인(同人) 작품 전시회를 연다는 말에 오랜만에 인사동의 한 갤러리를 찾았다. 그중 눈길이 간 것은 밤이 지새도록 버선을 꿰매고 다듬이질을 하던 어머니를 회상한 작품이었다. 새하얀 버섯에 양초를 꽂아 마치 음표처럼 줄줄이 벽에 걸고 아래엔 다듬잇돌과 방망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그 작품을 보면서 나는 문득 문 선생의 어머니가, 아니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밤을 지새우는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며 이렇게 되뇌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 대학교수 시절에 가르쳤던 제자와 저녁을 함께 먹었다. 얼마 전 다니던 직장을 옮겼는데 이번 달 월급이 나올지 걱정이라고 말한다. 그가 앞서 전직한 주된 이유가 전 직장에서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아서였는데 말이다. 이처럼 큰 기업들과 달리 중소기업들은 죽을 맛인 곳이 수두룩하다. 어떤 이는 외환위기(IMF) 때보다도 힘들다고 말한다. 차라리 그땐 모두 힘드니 오히려 그걸 위안 삼았는데 지금은 남들은 괜찮은 듯 보이는데 나만 추락하나 싶어 그 자괴감과 상대적 박탈감이 더 크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는 아직 젊고 팔팔하기에 나는 이렇게 말해줄 수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 밴쿠버 겨울올림픽이 달궈놓았던 것들이 식으면서 우리는 다시 냉랭한 현실과 마주한다. 세종시 문제에 눈 팔려 있는 대통령과 정부도 날이면 날마다 일자리 창출을 말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청년백수들과 한창 일할 나이에 이런저런 이유로 직장에서 밀려난 중장년들은 더욱 넘쳐난다. 평일 대낮인데도 지하철을 타보면 등산복 차림이 적잖다. 등산복이 많이 팔리는 것은 계절적 수요만이 아니다. 할 일 없어진 그들이 산에라도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까닭이리라. 그들에게 나는 차마 이 말을 해줄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