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조백건 기자 loogun@chosun.com 김충령 기자 chung@chosun.com
패밀리레스토랑서 와인 마시는 '점심 회식' 인기, 직접 요리하는 '쿠킹회식' 공연 보는 '문화회식' 등 다양한 회식 스타일 생겨
"제가 이번 주말에 웨딩 촬영합니다!" "오, 벌써 그렇게 됐어요? 부럽다."
지난 7일 낮 12시 서울 중구 STX 본사건물 지하 1층 이탈리아 음식점에서 와이셔츠, 넥타이 차림의 남자 5명과 긴 생머리의 젊은 여직원 2명이 나무 테이블에 둘러앉아 웃고 손뼉치며 회식을 하고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빨간 스파게티와 노릇노릇 잘 익은 스테이크에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진갈색 조끼를 입은 김성호(42·석유제품팀) 팀장이 식사를 마치고 "다음 회식 땐 어디 갈까"라고 하자 여기저기서 제안이 빗발쳤다. "냉면 먹으러 가요" "겨울엔 순두부찌개예요."
STX 본사 직원인 이들은 대낮에 회식을 한다. 2주일에 한번씩 '점심 회식'을 하며 맛집과 여행 같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고민도 털어놓는다. 폭탄주는 없다. 회식은 점심 1시간으로 끝난다. 박형준(26)씨는 "점심 회식을 하면 부담도 없고, 저녁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 회식은 대부분 낮에 한다"고 했다.
늦은 밤 3·4차까지 폭탄주를 마신 뒤 노래방 고성방가로 마무리하는 한국의 전형적인 회식문화가 다양한 형태로 변하고 있다.
우선 '회식은 밤에 하는 것'이란 공식이 깨지고 있다. 서울 중구 을지로의 삼성화재 대리점장인 박인규(53)씨는 지난해부터 밤 회식 대신 일주일에 한두 번씩 점심회식을 한다. 부하직원들과 함께 점심 할인이 적용되는 뷔페나 횟집을 찾아다닌다. 박씨는 "2·3차로 이어지지 않으니 다음날 몸도 가볍고 불황에 돈까지 아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회식비도 각자 공평하게 부담하는 '더치 페이'를 한다. 박씨는 "점심회식이 굳어지다 보니 점심식사처럼 '내가 먹은 것은 내가 낸다'는 게 습관이 됐다"고 했다.
관공서와 기업이 밀집한 무교동에서 갈빗집을 운영하는 이영숙(47)씨는 "점심시간 때 10~20명씩 몰려와 인원수대로 삼겹살을 주문하고 소주는 고작 2·3병만 시키는 직장인들을 일주일에 3·4번씩 본다"고 했다.
밤 회식을 하더라도 3·4차까지 끝까지 '달리는' 경우는 점차 줄고 있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지난해 5월 전국 직장인 1188명을 상대로 설문한 결과 344명(29%)이 "회식을 1차로 끝낸다"고 답했다. 1년 전(13%)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신한은행은 작년 6월부터 회사차원에서 '술은 1차만 하되, 섞지 말고 한 가지 술로, 2시간 이내로 마시자'는 112 캠페인을 시행하고 있다. 신한은행 공보팀 김영길(35) 과장은 "밤 시간을 음주보다 독서 같은 자기개발에 투자하자는 취지"라고 했다. '술자리 행동지침'도 만들었다. 폭탄주 안 돌리기와 원샷 강요 금지, 파도타기 금지, 후래자(後來者·술자리에 늦게 참석한 사람) 3배 금지 등이다.
술 없이 편하게 놀기만 하는 회식도 있다. STX팬오션 태평양영업본부 조양진(37) 운항2팀장은 2008년 말 팀장이 되고 나서 '멀티방' 회식을 만들었다. 8명의 팀원은 노래를 부르거나 영화를 보고, 게임도 할 수 있는 멀티방에서 1~2시간 놀다가 귀가한다. 조 팀장은 "자기개발에 연애도 해야하는 젊은 사원들은 늦게까지 술 마시는 걸 싫어한다"며 "나 역시 맨정신에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부담없이 얘기하고 놀다가 헤어지니 부하직원들도 좋아하고, 다음날 업무에 지장도 없다"고 했다.
회식 시간을 이용해 보양식을 먹으러 가거나 운동을 하는 '보신 회식'도 늘고 있다. 대우증권 자기자본투자팀에서 일하는 임자균(27)씨는 "팀원이 3명이다 보니 팀별로 간소하게 저녁 먹고 헤어지는 게 회식"이라며 "특히 몸에 좋은 삼계탕 같은 보양식을 자주 먹는다"고 했다. 임씨는 "퇴근 후에 승합차를 대절해 남한산성에 가서 장어를 먹고 오기도 한다"고 했다. 인터넷 전문기업인 엔에이치엔(NHN)의 성과지원팀은 매달 열리는 회식을 1시간짜리 발마사지로 마무리한다. 이 부서에 근무하는 공보람(26)씨는 "바쁜 업무로 지친 몸을 풀고 팀원들과 편하게 대화할 수 있어 좋다"며 "마사지를 받은 뒤엔 모든 팀원이 '시원하다'고 좋아한다"고 했다.
회식과 취미생활을 융합한 '취미회식'도 생겨나고 있다. 하나UBS자산운용의 임정진(33)차장은 "부하직원들이 회식 때 술만 마시지 말고 취미생활을 하자는 의견을 냈고, 작년 11월 말쯤에는 요리학원에 가서 직접 요리를 배우고 만들어서 그 음식으로 회식을 했다"고 했다. 임 차장은 "지난해 10월에는 메이크업(화장) 강사를 불러 화장법을 배웠고, 곧 팀원들과 회식시간에 꽃꽂이도 배울 생각"이라며 "다들 너무 재밌어한다"고 했다.
회식비를 모아 영화, 뮤지컬 등을 보는 '문화 회식'도 점차 일반화되고 있다. 한국휴렛팩커드(HP)에서 일하는 황종연(31) 대리는 "회식은 한 달에 한 번쯤 있는데 주로 영화나 뮤지컬, 연극을 보러 간다"고 말했다.
고려대 사회학과 김문조(61) 교수는 "과거 생산중심의 사회에서 지금은 여가중심 사회로 시대가 변했다"며 "회식도 여가활동처럼 변해가는 것이 당연한 시대 흐름"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특히 여가 중심적 성향이 짙은 신세대 직장인들이 회식문화를 주도하게 되고 이를 장년층 간부들이 받아들이고 좇다 보니, 기존의 '폭탄주 회식문화'가 매우 다양하게 변하는 '회식의 재사회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 ▲ 7일 낮 12시 STX 본사 직원 7명이 회사 지하 1층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으며‘점심 회식’을 하고 있다.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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