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C초 일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빈곤퇴치 위해 ‘부자 사치근절’ 주장 약점 지녔지만 ‘도덕주의’ 공감 얻어 〈빈곤론〉 가와카미 하지메 지음 송태욱 옮김/꾸리에 1만5000원
<빈곤론>은 20세기 전반기 일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대표하는 학자 가와카미 하지메(1879~1946)의 저작이다. 37살 때 쓴 이 책은 대작도 아니고 대표작도 아니지만, 가와카미의 얼굴과도 같은 구실을 하는 저작이다. 이와나미서점에서 나온 ‘가와카미 하지메 전집’ 36권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이 저작이라고 한다. 한 손에 잡히는 이 단출한 책에는 가난의 고통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한 윤리적 인간’의 정신이 담겨 있다.
가와카미의 삶은 전력을 다하여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삶을 닮았다. 만행과도 같은 맹렬한 사상 편력이 여기서 비롯했고, ‘윤리적 마르크스주의’라는 독특한 경지가 이 편력의 끝에서 열렸다. 1905년 <요미우리신문>에 ‘사회주의 평론’을 열화와 같은 독자 호응 속에 연재하던 26살 도쿄대 강사는 이 연재물을 갑자기 중단하고 ‘절대적 이타주의’를 내세운 종교단체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 종교단체의 실상이 자신의 이상과 맞지 않음을 알고 두 달 만에 뛰쳐나왔다. 이 일화는 진리를 보았다고 생각하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바로 행동에 돌입하는 그의 삶의 자세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이타적 도덕주의’를 일찍이 삶의 화두로 삼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부르주아 경제학에서 학문적 이력을 시작한 그는 40대에 이르러 마르크스주의로 행로를 바꾸었고 공산당에 입당했다. <자서전>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나이가 들어 비로소 입당 기회를 얻고서 로자처럼 울었다.” 가와카미는 결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분야에서 독보적 업적을 쌓았지만, 도덕주의라는 근본태도는 마지막까지 기저음으로 남아 그의 사유에 독특한 울림을 심었다.
<빈곤론>은 그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전인 1916년에 신문에 연재해 이듬해 출간한 책이다. 이 책에는 빈곤과 궁핍의 시대를 향한 가와카미의 분노 섞인 규탄과 이 사회적 질병을 퇴치할 방책에 대한 논구가 담겨 있다. 그는 ‘자발적 가난’과 ‘강제된 가난’을 구분한다. 스스로 선택하여 기꺼이 받아들인 가난과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가난은 같을 수 없다. 가난이란 그저 물질이 부족한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결핍의 공포와 두려움, 이것이 바로 가난이다.” 그 공포와 두려움이야말로 ‘강제된 가난’의 본질적 모습이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지만, 빵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자발적 가난은 절감하지 못한다.
이 강제된 가난의 실상을 규명하려고 그는 ‘빈곤선’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육체의 정상적 발육과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계비가 이 빈곤선을 긋는 지점이다. 최저생계비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빈곤선 이하’의 상태가 그가 말하는 가난, 곧 절대적·절망적 가난이다.
그는 통계 자료를 끌어들어 세계 최대의 부국이라는 영국의 런던에서조차 빈곤선 이하의 가난한 사람이 인구의 30%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울러 최상층 2%가 전체 부의 72%를 소유하고 있음도 밝힌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에 왜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 많은지 이유가 밝혀진다. “소수의 부자가 엄청나게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와카미는 이어 왜 가난한 사람들이 죽도록 일을 하고도 생필품조차 제대로 얻지 못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그는 ‘필요와 공급의 불균등’을 원인으로 제시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구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공급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공급은 생활에 하등 필요하지 않은 사치품으로 쏠린다. 구매력이 큰 부자들의 수요 때문이다. 가와카미는 사치품 생산에 생산력이 소비되느라 생필품에 필요한 생산력이 줄어든다고 성토한다. 절대적 빈곤을 없애려면 사치품 소비를 줄이고 생산력을 생필품으로 돌려야 한다. 이런 진단은 산업예비군의 압력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끌어내린다는 사실, 그리고 최저생계를 감당할 만큼 임금을 올리려면 노동자들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와카미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어쨌거나 이런 진단 위에서 가와카미는 빈곤이라는 시대적 질병을 퇴치하려면 부자들의 사치 근절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유한계급의 사치는 사회의 죄악이다.” 왜냐하면 사치품을 생산하느라 사회의 생산력이 생필품에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산업을 국유화해 나라에서 생필품을 생산하는 식으로 경제 조직(자본주의 체제)을 개조하는 것도 방법임을 가와카미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체제 개조가 근본 방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외적인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와카미의 도덕주의적 관점은 적지 않은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10여년 뒤 가와카미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제2 빈곤론>(1930)을 써 앞 책의 한계를 고백하고 극복했다. 그러나 <빈곤론>에 담긴 그의 진단과 처방은 당대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가난을 강요하는 사회 현실에 대한 도덕적 분노의 파토스가 사람들의 폐부를 찔렀던 것이다. 1933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4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던 가와카미는 끝까지 마르크스주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지만 실천의 장에서 물러난 자신을 ‘전향자’로 간주해 스스로 유폐 생활을 했다. 그는 일본 패전 직후인 1946년 영양실조와 급성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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