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유머’는 인간의 가장 고등한 ‘지적 활동’ 중 하나… 지난 10년간 ‘열등한 존재’를 당당함으로 반전시켜 [정재승]
21세기 대한민국 개그의 현주소는 일요일 저녁 9시 한국방송 <개그콘서트>에서 발견된다. 특정 집단에 대한 풍자나 노골적인 성적 농담을 거세당하고도, 매주 온 국민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그들의 개그는 가히 달인 수준이다.
일요일 저녁 혼자 TV 앞에 앉아 조용히 <개그콘서트>와 맞서려는 시청자라면 대박 웃음을 낚긴 어렵겠지만, 한국방송 녹화장에서 <개그콘서트>를 직접 방청하면 개그가 주는 웃음 외에 ‘감동’도 얻을 수 있다. 녹화 전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방청객과 함께 벌이는 즐거운 현장 개그, 예상 외로 적은 NG와 쉴 틈 없이 진행되는 코너들, 녹화 뒤 개그맨들이 무대에서 선보이는 개인기 퍼레이드, 그리고 웃을 준비가 돼 있는 따뜻한 관객들.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은 혼자 볼 때보다 여럿이서 함께 볼 때 무려 30배나 더 많은 웃음이 터져나온다는 심리학자 로버트 프로빈 교수의 연구 결과가 거짓이 아님을 방청객 모두는 체험하게 된다.
스탠딩으로 웃기기 어려운 이유
<웃음: 그에 관한 과학적 탐구>(Laughter: A Scientific Investigation·2000)로 잘 알려진 웃음 연구의 대가 로버트 프로빈 교수(미 메릴랜드주립대 심리학)의 연구는 토크쇼나 리얼 버라이어티 장르에 비해 <개그콘서트> 같은 스탠딩 개그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설명한다.
그는 대학 캠퍼스에서 웃고 떠드는 학생들 1200명의 대화 내용을 분석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대화 도중에 웃는 게 농담이나 재미있는 얘기 때문인 경우는 10~20%에 불과하며, 대부분 친구의 근황이나 자신이 겪은 일상적인 경험을 주고받을 때라는 것이다. 가장 큰 웃음이 터진 대화들을 분석해봐도 그다지 포복절도할 내용은 아니었으며, 농담을 듣는 사람보다 농담을 하는 사람이 1.5배 이상 더 많이 웃었다.
이 연구 결과는 우리에게 웃음은 ‘유머에 대한 생리적인 반응’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해주는 사회적 신호’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친하거나 호감이 가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워 웃는 것이지, 농담을 주고받아야만 웃음이 터지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토크쇼나 리얼 버라이어티에선 유머러스한 농담이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보다 높지 않다. 그에 비하면, 일상적인 경험담 없이 농담 자체로 웃겨야 하는 <개그콘서트>나 <웃찾사>는 ‘유머의 진검승부’가 아닐 수 없다.
<개그콘서트>는 웃음을 유발하는 심리 전략이 매 코너에 잔뜩 녹아 있는 ‘유머의 교과서’다. 그중 가장 매력적인 전략은 기대감 배반이 주는 ‘반전의 웃음’이다. 평범한 대화와 인트로로 예측 가능한 ‘전형적인 상황’을 만들었다가 뒤통수 치는 결말로 반전의 웃음을 주는 방식이다. 뒤통수를 얼마나 세게 치는지가 개그 수준을 결정한다. 착한 남자가 등장해 한 여성에게 잘해주지만, 이내 등장한 ‘나쁜 남자’는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악성 바이러스’에서는 연주자들이 기상천외한 곡들을 연주한다. ‘할매가 뿔났다’ ‘독한 것들’ ‘달인’ ‘안상태의 뿐이고’ 모두 반전이 주는 재미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코너들이다.
‘타이밍’의 명수들
과학자들은 반전을 ‘모순 이론’으로 설명한다. 논리적으로 쉽게 연결되지 않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때 사람들은 갈등(혹은 모순·incongruity)을 경험하고 그것이 해소(resolution)되면서 웃음을 터뜨린다는 것이다. <개그콘서트>의 개그맨들이 뛰어난 것은 반전의 핵심인 ‘타이밍’을 매?잘 맞춘다는 점이다. 이건 뛰어난 연기력을 필요로 하는데, 기대감이 한껏 고조된 상황에서 ‘적절한 타이밍’으로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을 만들어내는 것은 ‘개그 달인의 내공’이 없으면 어려운 것이다. NAN방송사 안상태 기자가 평범한 목소리로 뉴스를 리포트하다가 멈추고 정적이 흐르면,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나오기도 전에 관객이 웃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피터 더크 박사는 ‘반전 개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지능 발달에 매우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피터 더크에 따르면, 일단 유머가 시작되면 우리의 대뇌는 다양한 결말을 예측해보며 점점 긴장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다가 결말이 엉뚱하게 마무리되면,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그동안의 예측들을 머리에서 지우고 새로운 틀 안에서 전체적인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예상치 못한 결말이 전체 이야기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때, 사람들은 유쾌한 웃음을 터뜨린다. 바로 이 짧은 반전의 순간에, 뇌에서는 복잡한 정보 처리 과정이 일어나며, 창의력처럼 고등한 사고 과정을 담당하는 뇌 영역이 활발히 활동한다는 것이다. ‘반전 유머’는 인간의 가장 고등한 ‘지적 활동’ 중 하나이니, 학부모들이여, 대한민국의 모든 청소년들에게 <개그콘서트> 시청을 허하라!
<개그콘서트>가 <웃찾사>나 <개그야>에 비해 단연 돋보이는 대목은 ‘적절한 음악(효과음) 사용’이다. 기대감을 유발하고 극적 반전의 해소를 최대화하기 위해 코너마다 음악이 사용되는데, 개그맨들의 연기만큼이나 중요할 때가 많다. ‘나쁜 남자’나 ‘순정만화’ ‘도움상회’ ‘연애 컨설턴트 박지선’ 같은 코너에 음악이 없다고 상상해보라.
찰리 채플린이나 배삼룡, 심형래 등의 바보 개그 전통도 여전히 <개그콘서트>에서 발견된다. 플라톤 이래 수많은 철학자들이 주장한 ‘우월성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타인에게서 실수나 결점을 발견하거나, 혹은 뭔가 모자라는 듯한 행동을 보게 되면 웃는다. 예를 들어 ‘미쳤어’의 박휘순이 자학 개그를 한다거나, 김대희가 ‘바보 대구’를 연기할 때, 우리가 터뜨리는 웃음에는 ‘너는 나보다 멍청해’라는 우월감이 내재적으로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개그콘서트>의 발전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열등한 존재’들의 당당함이다. 얼굴이 못생긴 여성이 놀림감이 되는 개그는 예나 지금이나 있어왔지만, 박지선과 신봉선, 강유미 등 요즘 개그우먼이 이영자와 다른 점은 그들에게선 열등감과는 거리가 먼 ‘건강함과 당당함’이 있어서다. ‘변 선생’의 변기수나 ‘준 교수’의 송준근, <웃찾사>의 김늘메처럼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시청자가 사회적 편견 없이 건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점은 지난 10년 동안 한국 코미디가 이룩한 성과다. 실컷 웃고 나서 프로그램이 끝나면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던 ‘불편함’이 줄어들었으니 말이다.
‘황현희 PD의 소비자 고발’이나 ‘박대박’처럼 당연하다고 여겨진 ‘친숙한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낯설게 하기’, ‘도움 상회’나 ‘할매가 뿔났다’처럼 사회적 이슈나 ‘버릇 없는 아이’ 같은 세태를 비꼬는 풍자 개그도 고급 개그의 한 예다.
앞으로 360년간 기대할 수 없는 것
어느 시민단체가 <개그콘서트>를 ‘나쁜 방송’으로 선정한 것이 인터넷상에서 논란이 됐다. <개그콘서트>에 여전히 사회적 약자 비하, 북한 비하, 외모 비하, 자학 및 막말 사용 등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내용이 포함돼 있는 것은 사실이다. “웃음이란 열등한 타인을 통해 뜻밖의 우월감을 느꼈을 때 나타나는 말초적인 승리감에 불과하다”라고 토머스 홉스가 360년 전 자신의 책 <리바이어던>(Leviathan·1651)에서 얘기한 걸 보면, 앞으로도 360년간 개그 프로그램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길 기대하기란 무리일 것 같다.
차라리 시청자에게 “개그는 개그일 뿐 오해하지 말자!”라고 ‘개그를 바라보는 태도’를 제대로 일러주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이거 제대로 못 배우면, 나중에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덤벼드는 ‘똥·오줌 구별 못하는’ 인간들이 되고 만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과 한겨레 21
사진 » 서사의 전개 끝에 반전을 주던 코미디 형태는 매 순간 웃음의 포인트를 만드는 것으로 변화했다. 웃음 연구의 대가 프로빈 교수의 연구는 토크쇼에 비해 스탠딩으로 웃기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준다. 한국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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