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책(冊)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물조아 2008. 4. 23. 16:04

1. 책머리에 이 책의 끝을 맺고 있는 글은 『논어』‘위정편’의 한 구절을 인용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지만 소인은 편벽되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라는 글로서 끝맺음을 하였다.


그러므로 작가는 “완전하지 못한 사람을 완전한 존재로 인위적 조작이 신화이고, 그 신화에 도전하는 것을 거부하는 물리적 힘이 금기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우암 송시열은 우리 역사에서 하나의 신화이다. 대부분의 신화들이 과장되어 있거나 상당부분 조작되어 있듯이 송시열도 이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송시열은 당쟁의 와중에서 사형 당한 인물이란 점에서 그 신화는 일종의 신비감마저 띠고 있었다.


현재의 극심한 당쟁에 기초한 지역감정이 이성적인 접근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듯이 송시열에 대한 이성적 접근도 인위적으로 거부되어 있었다. 오늘날 지역감정에 기초한 정당의 지도자들이 그 실체적 진실 여부를 떠나 위인과 악마라는 양극단에 서 있듯이 송시열 역시 지난 세월 동안 성인과 악마 사이를 넘나들었다.


문제는 그를 성인으로 추앙했던 당파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집권당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조선후기에 성인 송시열을 비판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 위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침묵하는 동안 송시열은 하나의 신화가 되어 왔다. 그것이 바로 금기였다. 금기가 존재하는 사회는 비문명적인 후진사회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지역감정이란 정신병에 냉정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양비론으로 심상한 처방만 일삼는 동안 그 정신병은 어느덧 전염병으로 변해 민족이라는 공동체를 파괴의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우리가 금기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실례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금기는 깨어져야 한다. 이 책의 발간이 지역감정이나 비이성적 당쟁에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하는 현 시대의 저급한 정치인식에 하나의 역사적 반성과 시사의 계기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라고 하였다.


2. 논쟁 속으로 들어가다 우리역사상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을 꼽는다면 단연 송시열이다. 우암(尤庵) 송시열 그는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오래 살았다. 환갑만 지나면 나라에서 경로잔치를 열어주던 시대에 그는 83세란 기록적인 수명을 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연이 준 수명을 다 누리지 못했다. 그의 나이 83세에 사약을 마시고 사사(賜死) 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의 살아생전은 조선역사상 가장 치열한 당쟁의 시대였고 그는 서슴없이 온몸을 당쟁에 내던졌다. 실로 그는 조선시대 최대의 당쟁가였던 것이다. 따라서 송시열과 그가 이끌었던 한 시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그를 통해 현 시대를 바라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3. 흔들리는 주자학의 나라 어찌 감히 농민들이 사대부를 넘보랴, 그가 태어나고 성장할 무렵, 조선 지배층인 사대부 계급은 개국 이래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는 선조 40년(1607)에 태어났다. 그 15년 전에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조선이 개국한지 정확히 200년 후인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은 사대부 중심의 조선 지배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조선사회는 비단 왜적의 침입 때문만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후기 조선사회를 이끌었던 그의 인생이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가 이런 상황에서 태어났다는 점에 있다.


그의 첫 번째 스승인 아버지는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을 교재로 삼았다. 격몽요결은 ‘무지몽매를 깨뜨려 버리는 데 요긴한 비결’이란 뜻으로 어린 아이 교육용 성리학 교과서이다. 율곡이 쓴 이 책의 서문을 보면, “학문의 길에 막 들어선 이들이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당혹해 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공부의 바른 길을 인도해 주기 위해 지은 것이다.”


또 격몽요결의 제1장 입지편의 첫 구절을 보면 “처음 배우는 사람은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성인이 될 것을 약속해야 한다. 털끝만큼이라도 자신이 남보다 뒤떨어진다는 생각에 자신을 버려서는 안 된다.”라고 되어있다. 그는 『맹자』를 천 번 이상 읽었다고 소문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외고집 적인 성격은 아버지의 고집스런 성격을 이어받은 점과 어린 시절의 이런 편중된 교육 탓이 큰 것을 보았다. 그는 평생 타인과 대립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대립 그 자체가 아니라 타인의 사상이나 처지를 인정하지 않는 자기만의 절대적 자세이다.


조선 성리학의 학문적 계보는 크게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었다. 동인의 종주는 퇴계 이황이고, 서인의 종주는 율곡 이이이다.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다. 이기일원론을 주창한 율곡의 사상이 이들에 이르러 예학으로 변화한 것은 조선 성리학이 사회 변화를 저지하는 보수적인 사상으로 퇴화했음을 의미한다. 조선성리학의 주류로 만든 예학은 개혁이 아니라 수구 사상이었다. 예학은 한마디로 말하면 각 신분에 따르는 분수와 예절을 지키라는 주장이다. 이 사상에 따르면 농민은 결코 지배계급인 사대부에게 저항할 수 없다. 사대부는 영원한 지배계급이고 농민은 영원한 피지배계급인 것이다. 지금의 혈연보다도 학연을 더 높이는 우리 사회의 풍토는 이들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4. 인조반정, 그 비극의 뿌리 선인들의 쿠데타, 인조반정이 낳은 비극들, 광해군 15년(1623) 서인들이 이끄는 무리들은 광해군과 북인정권을 무너뜨렸다. 조선이 개국한지 두 번째로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는 반정이 성공한 것이다. 이를 인조반정이라고 부른다. 반정(反正)은 그른 것을 바른 것으로 되돌렸다는 의미지만 이는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 쪽의 견강부회이고 인조반정은 조선의 운명을 비극으로 이끌어간 시대착오적인 사건이었다.


즉 서인들은 오로지 권력을 장악할 야심으로 광해군과 북인정권을 끌어내리려 했다. 이들은 명과 청 사이에서 조선의 국익을 위한 광해군의 양면외교 정책이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며 선왕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 김씨의 존호를 폐하고 서궁이라 칭한 것은 불효라는 명목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인조 17년(1639)때 산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율곡의 학통을 이은 기호유림의 계승자인 송시열과 송준길을 거듭 불렀던 것이다.


5. 북벌의 시대 대동법의 시대 북벌, 말인가 실천인가, 인조가 세상을 떠난 다음달인 효종 즉위년 송시열은 드디어 출사 길에 올랐다. 이때 송시열의 나이 만 42세 때였다. 그래서 효종의 북벌 정치를 정면으로 반대를 한다. 그는 기축봉사에서 공자의 대일 통은 중국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나라란 사상이었으며, 그리고 우리나라가 치욕을 받은 사실보다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는 것을 구구절절 더 슬프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즉 그는 중국이란 고정된 특정 지역이 아니라 도가 행해지는 지역을 뜻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효종의 북벌정치와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가 북벌의 군주 효종이 급서를 당하자 북벌의 방침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또한 효종 때는 대외적으로 북벌의 시기지만 대내적으로는 대동법의 시기이기도 하다. 대동법은 공납을 대신해 시행되었던 세법의 일종이다.


조선의 세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토지세인 전세, 노동력은 제공하는 신역, 그리고 그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이 그것이었다. 이 중 공납을 대신하는 세법이 대동법이었다. 대동법은 간단하게 말해 부과 기준을 일정하게 하자는 법이었다. 즉 부과단위를 애매하게 읍과 호가 아니라 전세처럼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바꾸자는 법이 대동법이었다. 그는 대동법을 국가의 공적 법률이란 차원이 아니라 사제지간이라는 개인적 차원에서 접근했다. 학연과 당파적 이익이란 소리를 국가와 백성의 이익이란 대의 보다 앞세운 자세로 처신하였다. 그는 백성이라는 공보다는 산당이라는 사를 우선한 집단 이기주의의 비판을 받았다.


6. 왕위에 올랐다고 가통까지 이은 것은 아니다-예송논쟁 제1차 예송논쟁은 간단하게 말해 효종이 승하했을 때 모후 자의대비가 장자의 예를 따라 3년 복을 입어야 하는지 아니면 차자의 예를 따라 1년 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었다. 15년 후 제2차 예송논쟁은 효종비 인선왕후가 승하했을 때 역시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자의대비의 장자 부의 예에 따라 1년 복을 입어야 하는지 차자부의 예에 따라 9개월 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었던 것이다.


예송은 이처럼 예론을 이용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정쟁의 측면은 지니고 있지만 나아가 예론을 이용한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대립이란 측면도 지니고 있었다. 어쨌든 예송논쟁은 인조반정 이래 유지되어 오던 남인과 서인의 상호 공존적 측면은 붕괴되었다. 당쟁의 악화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당쟁은 또한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도 재위15년 34세의 한창 나이에 급서 하도록 하였다.


7. 국익보다는 당익이 앞선다 정권을 놓치면 모든 것을 잃는다. 예송논쟁의 여파로 서인정권은 몰락을 하고 틈새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분당되었다. 분당의 이유는 서인에 대한 대응자세의 차이였다. 즉 서인에 대한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뉜 것이다. 남인들은 숙종의 신임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서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정권을 쟁취하고 유지해 왔다. 하지만 남인들은 국왕과 연합해 정권을 잡았다. 즉 국왕과 연합정권이었다. 그러나 그 연합은 채 1년을 가지 못했다.


또한 정권이 바뀌자 수사결과도 바뀐 것이니 수사기관의 권력지향성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닌 듯했다. 정치란 고금을 막론하고 이처럼 냉혹하고 무상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조반정을 일으켜 임금을 갈아 치운 세력이 서인이었다. 그는 “나의 관은 덧붙인 널빤지를 사용하라.”라고 하면서 효종의 관이 덧붙인 널빤지였음을 미안하게 여긴다는 뜻이었다. 그리고는 그는 사약을 들이켰다. 83세의 파란 많은 생애가 정읍에서 막을 내린 것이었다. 1689년 6월 8일 아침이었다.  끝. '10.5.1  '11.12.29  201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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